김라경 “日서 라멘집 알바 뛰며 야구… 美프로까지 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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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팔꿈치 부상으로 수술
올해 대학 졸업 후 세이부 입단… 실업팀선 6시까지 일한 뒤에 훈련
유소년 지도 등으로 생활비 충당
“믿어준 사람들 위해 끝까지 도전”

지난달 경기 남양주의 한 야구장에서 만난 김라경이 소속팀 일본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고 야구공을 쥔 채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한국 여자 야구 에이스인 김라경은 “야구에는 희로애락이 다 담겼다. 때론 외롭고 슬프지만 그만큼 행복을 주는 것이 바로 야구”라며 “여자 야구 후배들에게 용기를 준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남양주=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지난해 한국프로야구는 1000만 관중 시대를 열었다. 올 시즌도 연일 매진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프로야구 선수들과 달리 국내 여자 야구 선수들은 여전히 고독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 여자 야구 대표팀 에이스 김라경(25)도 예외는 아니다. 3년 전 토미존(팔꿈치 인대접합) 수술을 받고도 야구공을 던지기 위해 다시 일본 무대를 두드리는 김라경의 도전기를 소개한다.

“차라리 인대가 한 번 더 끊어져야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난달 경기 남양주의 한 야구장에서 만난 김라경은 웃는 표정으로 이처럼 ‘살벌한’ 이야기를 했다. 오른쪽 팔꿈치에는 3년 전 받은 수술 자국이 선명했다. 김라경은 “다시 마운드에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하다. 이번 수술이 내 야구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달 26일 서울대 체육교육과를 졸업한 김라경은 이튿날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본프로야구(NPB) 세이부 산하 실업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세이부)’에 입단하기 위해서다. 일본 실업팀들에 직접 제작한 훈련 영상을 보내고 화상 면접 등을 거쳐 세이부 유니폼을 입게 된 김라경은 29번을 달고 투수로 뛴다.

김라경이 일본 무대를 노크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김라경은 앞서 2022년 6월에도 실업팀 아사히 트러스트에 입단했다. 그러나 김라경은 일본 입국 뒤 닷새 만에 치른 첫 연습경기에서 마운드에 올라 연습 투구를 하던 중 팔꿈치에 엄청난 통증을 느꼈다. 경기에 들어갔지만 초구에 몸에 맞는 공을 던진 뒤 강판됐다. 김라경은 “공을 던지는데 옷이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하루빨리 자리 잡고 싶은 욕심이 앞섰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뼈가 부러졌지만 인대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받고는 재활을 시작했다. 복귀를 앞당기고 싶은 마음에 팔에 깁스를 한 채로 고강도 러닝과 웨이트트레이닝을 소화했다. 그러나 다쳤던 뼈가 붙고, 근육량이 회복돼도 팔의 통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4개월 뒤 한국에 들어와 다시 병원을 찾은 김라경은 인대가 끊어졌다는 진단에 결국 토미존 수술을 받았다.

선수 생명의 위기에서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다. 김라경의 사연을 접한 이제형 청담리온정형외과 원장(프로야구 두산 팀 닥터)이 무상으로 수술을 집도했다. 류현진(한화)의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시절 개인 트레이닝 코치로 활동했던 김병곤 스포츠의학 박사도 김라경의 재활을 돕기 위해 나섰다.

다시 마운드에 선 김라경은 현재 최고 시속 110km 후반대로 이전 구속을 거의 회복했다. 투구 폼도 정통 오버핸드에서 오버핸드와 스리쿼터 중간 정도로 손봤다. 오른팔 통증으로 왼손타석에서도 타격을 하는 연습을 하면서 스위치히터로도 변신했다. 다만 일본에서는 투수에 집중할 계획이다.


김라경의 야구 인생은 곧 투쟁의 역사였다. 김라경은 7세 터울의 오빠(전 한화 투수 김병근)를 따라 초등학교 6학년 때 리틀야구 무대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뛸 곳이 없어지자 여자 선수는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리틀리그에서 뛸 수 있도록 허용하는 일명 ‘김라경 룰’이 제정됐다.

2017년 경기 이천에서 열린 LG컵 국제여자야구대회 경기에서 2루 도루를 시도하고 있는 김라경(오른쪽). 당시 김라경은 고교 2학년이었다. 동아일보DB
2017년 경기 이천에서 열린 LG컵 국제여자야구대회 경기에서 2루 도루를 시도하고 있는 김라경(오른쪽). 당시 김라경은 고교 2학년이었다. 동아일보DB
재수 끝에 2020년 서울대에 입학해서는 야구부에 들어가 한국대학야구연맹 사상 최초의 여자 선수가 됐다. 2021년에는 여자 야구 후배들을 모아 ‘JDB(저스트 두 베이스볼)’라는 팀을 직접 창단하기도 했다. JDB는 재정 문제 등으로 1년 만에 해산됐다.

일본에서의 도전도 순탄하지만은 않다. 실업팀에 소속돼 있다 보니 평일에는 구단에서 연결해 준 일자리에서 오후 6시까지 근무를 한다. 4월부터 유소년 야구교실, 일본 라멘집 등에서 일하며 현지 생활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한다. 팀 훈련은 퇴근 후에야 할 수 있다. 숙소는 팀에서 제공해주지만 별도의 이동 수단이 없어 렌터카를 몰아가며 생활해야 한다. 개인 훈련을 하기 위해서도 별도의 비용이 든다. 대학 시절만 해도 김라경은 OK 배·정장학재단의 장학금으로 학교에 다니며 야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김라경은 일본 무대에서의 활약을 발판으로 2026년 미국에서 출범하는 위민스 프로 베이스볼리그(WPBL)에 입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현 소속팀 세이부에는 김라경의 롤모델인 사토 아야미(36)가 있어 좋은 동기 부여가 되고 있다. 사토는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이 주관한 여자야구 월드컵에서 3회 연속(2014, 2016, 2018년) 최우수선수(MVP)를 수상한 여자 야구의 전설이다. 김라경은 “사토 선배와 컨디션, 멘털 관리부터 야구의 발전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말했다.

김라경은 이달 22, 23일 열린 도치기 사쿠라컵 대회에선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김라경은 한 차례 구원 등판해 3분의 2이닝 동안 1실점을 기록했다. 경기 내용은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생각보다 자신감 있게 공을 던졌다. 무엇보다 팀원들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커졌다”는 설명이다. 다음 달 시작하는 비너스 리그에서는 보다 많은 등판 기회를 얻을 전망이다. 올 시즌 목표로는 평균자책점 1점대를 내걸었다.

“사실 언제 야구를 그만둬도 이상하지 않은 현실이라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나의 열정과 야구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믿어준 사람들을 위해 끝까지 포기할 수 없다.” 김라경은 오늘도 인생의 마운드 위에 오른다.

#여자 야구#김라경#일본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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