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1999년 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됐을 때 제 이름이 정확하게 나온 신문 기사가 거의 없었어요. ‘손찬환’ 아니면 ‘손창완’….”
프로농구 소노 지휘봉을 잡은 손창환 감독 얘기다. 스스로 생각해도 농구로 크게 될 운명이 아니었다.선수 시절 조명을 받지도 못했고 은퇴도 빨랐다. 학연, 지연에 의지하거나 도와 달라고 빌붙어 볼 커리어도 없다. 2003년 은퇴하고 성실성과 노력으로 농구계에서 버텼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농구계를 떠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 전력 분석의 세계를 알았다. 마음 잡고 ‘존버(끈질기게 버티다는 뜻의 신조어)’했다. 몸 담은 팀이 공중분해 돼 막노동도 했다. 그리고 감독이 됐다.
그는 여전히 말을 아끼는 데 익숙하다. 앞에 나서는 것보다 뒤에 있어야 편하다.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어떻게 감독으로까지 인정받을 수 있었는지. 앞으로 어떤 농구를 보일지 말이다. 그가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겪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조금씩 알기 시작하면서 걱정보다는 기대가 많다.
코트 안이든 밖이든 데이터가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는 손창환 프로농구 소노 감독. 소노 스카이거너스 제공 ● 농구 몰라 은퇴… 건물 발파 유학가려다 전력 분석하며 농구에 눈뜨다
선수로 뛸 때는 힘들었다. 늦게 농구를 시작한 게 맘에 걸렸다. 대구 계성중 3학년 올라가는 겨울방학 때 농구를 시작했다. 농구하는 또래들보다 시작이 한참 늦었다. 기본기가 안 돼 있고 기술도 모자란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훈련을 해도 실력이 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계성고와 건국대 시절 주전이었다. 포워드와 센터 자리를 힘으로 지키고 버티는 재주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연세대가 대구실내체육관에서 계성고하고 자선 경기 같은 걸 했는데 제가 인생 최다 득점을 해 버렸죠. 그때는 연세대 갈 줄 알았어요. 하하.”
손 감독은 건국대 95학번이다. 쌍둥이 형제 조상현 LG감독과 조동현 전 현대모비스 감독, 황성인 전 단국대 코치가 연세대 95학번이다. 강혁 가스공사 감독과 김성철 전 DB코치는 경희대 95학번 에이스였다. ‘육각 슈터’ 조우현도 중앙대 95학번. 고려대에는 주희정 현 고려대 감독이 95학번으로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1999년 KBL(한국농구연맹) 신인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4순위로 안양 SBS(KGC 전신)에 지명됐다. 프로에서는 4시즌만 뛰고 유니폼을 벗었다. 마지막 2002~2003시즌에는 단 1경기에 출전했다. 마음 한 켠 깊게 박힌 농구에 대한 결핍을 이겨 내지 못했다. “은퇴하기 전에 휴가도 전부 반납하고 훈련을 엄청 했어요. 그런데 혼자 열심히 뛰고 해 봐야 의미가 없더라고요. 팀 시스템을 모르고 무작정 몸을 내던지니 한계가 온 거죠. 헛짓했어요. 죽도록 농구 해 봤자 잘하는 선배들한테는 안 되는구나.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계약 기간은 1년 남았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농구 말고 다른 일을 하기로 했다.
―그때 농구계를 떠났더라면 지금의 손창환은 없었다.
“건설업을 하던 큰 자형이 유학 가서 영어 공부하면서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발물로 건물 부수는 기술을 배워 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국내에서 그 분야 전문가가 필요할 테니 미국에서 제대로 배워 오라고요. 6개월까지는 생활비를 대 준다고 했어요. ‘그래, 한번 해 보자.’ 유학 준비를 하는데 팀의 이상범, 지금 하나은행 감독님이 말리는 거예요. ‘너, 워드프로세서, 엑셀 할 줄이나 아냐’고 대뜸 물으셨던 기억이 나요. 다른 일을 하려면 그것부터 먼저 배우라고 하셨어요.”
틀린 말도 아니었다. 농구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준비도 없이 타국에 가기도 민망했다. 그래서 눌러 앉았다. 구단 홍보팀 직원이 됐다. 기자들을 만나고 영업도 했다. “딱 내 체질이었어요.”
손 감독이 말하는 인생 변곡점이 이 시점이다. 농구 코트 밖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돈이 어떤 구조로 움직이는지 보게 됐다. 어려웠던 농구도 코트 밖에서는 보였다. 뛰고 또 뛰어도 몰랐던 농구. 그런데 공부하면 알 것 같았다. 자신을 괴롭혔던 농구 결핍 증세는 결국 노력이 부족해서였다. 공부가 모자랐다고 자책했다.
“뭐든 닥치는 대로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어요. 홍보팀 일이 재밌으니 제가 영업을 잘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대기업 본부장님하고 미팅을 하는데, 그분이 묻는 질문에 대답을 못했어요. 너무 부끄러운 거예요. ‘죄송합니다. 제가 공부해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일주일만 시간을 주십시요.’ 그분께서 웃으시더니 그 다음 주에 보자고 하시더군요. 그날로 그 대기업이 하는 사업에 대한 갖가지 정보와 이슈들을 달달 외웠죠. 잊어버릴 만하면 또 보고, 또 외우고 했어요. 그때 느꼈죠. ‘실력 없이 사람을 속이면 안 되겠구나.’ 농구할 때 농구도 모르면서 ‘손창환’을 속였던 거예요.”
2005년, 그에게 전력 분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 집 없어도 ‘자료 적금’은 든든한 나
코치 직까지 겸해 전력 분석만 20년 했다. 전력 분석을 시작할 때는 비디오테이프로 경기를 녹화하던 시절. 온갖 방식으로 변환하고 나눔 편집을 해야 감독이 분석 영상을 볼 수 있었다. SBS 본사에 파견까지 가서 4개월 동안 복잡한 편집 기술을 배웠다. 하다 보니 프로농구 1호 전력분석원이었다. 별의별 전략과 전술을 수없이 잘라 보고 뒤집어 봤다.
“농구 40분 경기를, 24초 공격 제한 시간을, 예를 들면 소고기를 안창살 등심 갈비 등으로 해체하는 것처럼 찢어 놔요. 그 묘미가 쏠쏠합니다. 비슷한 부분끼리 항목을 나눠 모아 놓고 분석해서 감독님께 전달합니다. 답을 찾아 놓고 해석도 합니다. 그런데 감독님에게 드리지는 않아요. 그건 월권이라고 봐요. 그래도 스스로는 해 봐요. 그렇게 쌓인 세월이 20년입니다.” 그의 전력 분석에서 중요한 건 비우고 새로 채워 넣는 거다. 써 본 건 과감하게 정리한다.
“제가 만들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자료는 공개해 버려요. 저한테는 유통기한이 지난 자료 거든요. 밖에 풀기 직전에 ‘업그레이드 버전’들을 만들어요. 남들보다 1~2년 빨리 트렌드를 찾고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어서죠. 그게 제 유일한 자부심이에요.”
감독직을 수락한 것도 적금 부어 찾아 쓰고 또 채우듯 쌓은 분석이 안겨 준 아이디어 때문이다. 아직 ‘똑똑한 집 한 채’ 없지만.
“감독 제안 받고 떠오르는 그림이 있었어요. 그게 생각 안 났으면 감독 안 했을 겁니다.” 이번 시즌 소노 전술의 핵심 포인트라는 얘기다.
손창환 프로농구 소노 감독이 코트에서 선수들의 훈련 영상 데이터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KBL 제공● 샘플 없는 ‘7 대 3’ 오펜스 설계… 이정현-이재도-켐바오 공존 셈법
“‘7대3 오펜스’였어요. 10번 공격 중 7번은 얼리 오펜스(상대 수비 대형이 갖춰지기 전에 빠른 패스와 움직임으로 진행하는 공격), 3번은 세트 오펜스(공격과 수비가 5대5인 상황에서 정해진 약속과 패턴으로 진행하는 공격)를 한다는 거죠.”
자세한 건 기밀이다. 7대3 오펜스는 선수들의 공존, 선택과 집중의 일관성, 특정 선수와 상황에서의 폭발력을 기대한다. 소노는 이정현, 이재도, 그리고 아시아쿼터인 필리핀 국가대표 케빈 켐바오의 삼각편대가 주축이다. 팀도 살리고 이 셋도 살리면서 공격력을 극대화하려는 선택이다.
“생각의 여유를 주지 않으려고 해요. 7은 누가 됐든지 빠른 공격을 하자는 거예요. 그러면 삼각편대 각자의 공격 기록은 지난 시즌보다 줄어들 수 있어요. 그들로선 혼란스러울 수 있을 거예요. 그래도 일곱 번은 팀 공격으로 인정하고 도와라, 희생해 달라는 거예요. 대신 세 번은 너희 셋이 세트 오펜스로 활용해 보라는 겁니다. 3의 세트 오펜스는 미국 앨라배마대학 방식에서 힌트를 얻어 다양하게 응용해 봤어요.”
손 감독이 만들어 놓은 ‘집’에서 핵심 선수 셋도 공존할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공격 10번 중 7번을 얼리 오펜스로 소화하려면 그들의 에너지 소모가 클 수밖에 없다. 이정현 이재도 켐바오는 세트 오펜스에서도 공격 효율을 높여야 한다. 무거운 숙제를 받아든 셈이다.
“쉼 없이 이름값 하라는 겁니다. 이정현, 이재도, 켐바오에겐 새 옵션과 커리어가 붙을 기회가 될 수 있어요. 셋이 답을 잘 찾겠죠.”
걱정이 없진 않다. 손 감독이 팀에 이식하려는 패턴, 작전, 전술은 샘플이 없다. 선수들이 참고할 만한 전례가 없다. 그런데 손 감독은 전력분석원이 아니다. 해석과 답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매일 훈련에 앞서 손 감독은 선수들과 ‘비주얼 미팅’을 한다. 딱 5분이다. 연습할 부분의 영상을 5분 보여 주고 훈련에 들어간다. 전에 없던 루틴이다.
“제가 추구하려는 농구가 팬들에겐 재미없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모든 선수를 전부 활용하니까요. 스타가 안 나올 수도 있어요. 선수 한 명에게 ‘몰빵’해서 유명하게 만들더라도 팀이 잘 된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팀 우선입니다. 팀이 잘 되면 자연스럽게 선수들이 주목받게 될 거예요.”
그런 차원에서 선수들이 뛰는 1분을 시즌 전에도, 시즌에 들어가서도 유심히 보겠다는 손 감독이다.
“전력 분석하면서 1분이 소중했어요. 늘 60초가 모자란다는 기분으로 살았어요. 1분을 절실하게 뛰는 선수들이 있어요. 제가 만들어 놓은 집에는 1분을 절실하게 뛰는 선수들이 입주하는 게 맞아요. 완전히 지는 경기에서도 1분에 모든 걸 쏟아붓는 선수가 팀에 필요해요. 40분 내내 서커스나 묘기를 보여 줄 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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