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롯데’가 주는 위로… “그래도 버티며 이겨내자”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8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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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 ‘롯데發 우울증’ 날리기
팬들, 롯데 승패에 일희일비… 연패때 일상생활 무기력증 시달려
“고향에 두고온 마음, 응원 못끊어”
샤워-향수, 안정감 찾는데 도움


“롯데 야구 때문에 우울증, 화병, 불면증, 공황장애 걸리신 분들. 유니폼 입고 저희 병원 방문해 주세요. 함께 이겨냅시다.”

박종석 연세봄정신건강의학과 원장(44·사진)은 프로야구 롯데가 창원 방문 3연전 첫 경기에서 NC에 6-7로 역전패하며 11연패를 당한 22일 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런 글을 남겼다. 23일에도 1-4로 무릎을 꿇으며 12연패를 당한 롯데는 24일이 되어서야 17-5 승리를 거두고 길었던 연패 사슬을 끊을 수 있었다.

롯데가 연패에서 벗어난 이튿날인 25일 서울 구로구에 있는 병원에서 만난 박 원장은 “11연패를 당한 그날 밤 내게도 순간적으로 공황 증세가 찾아왔다”면서 “다행히 오늘까지 롯데 유니폼을 입고 병원을 찾은 팬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만약 연패가 이어졌으면 진짜 오셨을 수도 있다. 한화 팬들이 ‘롯데와 한화는 동맹인데 한화 팬은 방문하면 안 되냐’는 문의도 주셨다”며 웃었다. 한화도 22일까지 6연패에 빠져 있었다.

부산 수영구 남천동 출신으로 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한 박 원장은 자신을 ‘서울 갈매기’라 부른다. 롯데 마스코트가 갈매기이고 대표 응원가가 ‘부산 갈매기’다. 초등학생이던 1992년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보고 야구팬이 된 박 원장은 그 이후 작년까지 32년간 우승이 없는 이 ‘못난 팀’ 응원을 끊지 못하고 있다.

박 원장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롯데는 고향에 두고 온 정체성과도 같다. 매일 야구를 보는 분들은 가족 얼굴 보는 시간보다 선수 얼굴 보는 시간이 더 길다. 그만큼 감정적 거리가 가깝기에 롯데의 승패에 일희일비하게 된다”고 했다.

박 원장은 6년 전 ‘정신의학신문’에 ‘롯데 자이언츠 유발성 우울증’이라는 칼럼을 기고해 화제를 모았다. 특정 자극으로 유발된 우울감과 불안감이 2주 이상 강하게 지속되고 일상생활까지 영향을 주면 ‘OO 유발성 우울증’이란 진단이 가능한데 롯데는 충분히 우울증을 유발하는 대상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2019년 롯데는 10개 팀 중 최하위를 했고, 이후에도 줄곧 하위권을 전전해 왔다.

박 원장은 “연패를 당하는 동안 ‘오늘은 이기겠지’ 하는 기대가 계속 배신당하면 기댓값이 떨어진다. 그러면 선수들도 자신감이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렇게 무기력이 학습되면 집단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며 “가장 좋은 방법은 이기는 것이다. 부정적 경험이 멈추면 새롭게 내일을 기대하게 된다”고 했다.

21일 잠실 LG전에서 연장 11회 끝에 6-6 무승부에 그친 뒤 연패를 끊지 못해 팬들에게 죄송하다며 고개 숙이고 있는 롯데 선수단. 뉴스1
이번 연패 기간 롯데는 14일 대전 한화전에서 연장 11회말 밀어내기 볼넷으로 경기를 내줬다. 17일 사직 삼성전에서는 황성빈의 9회말 솔로 홈런으로 8-8 동점을 만들고도 10, 11회 끝내기 기회를 연거푸 살리지 못한 채 무승부를 기록했다.

박 원장은 “연장까지 가면 경기가 늦게 끝난다. 화난 상태로 자려고 하면 불면증으로도 이어져 다음 날까지 망칠 수 있다. 그런 날은 꼭 찬물 샤워를 하고 잤다. 찬물 샤워는 미주신경을 자극해 불안 호르몬인 노르에피네프린은 낮추고 행복감을 주는 세로토닌은 높인다. 찬물로 손만 씻어도 분노가 가라앉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야구로 솟구친 화를 가라앉히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는 향수를 추천했다. 그는 “인지기능을 거치지 않고 뇌 심부로 바로 들어오는 후각이 가장 빠르게 안정감을 줄 수 있다”고 했다.

프로야구 롯데 팬들이 사직구장에서 ‘제발안타’라고 쓴 수건을 들고 응원하고 있다. 롯데는 팀 타율이 후반기에 꼴찌로 떨어지면서 12연패를 당했다. 롯데 자이언츠 제공
프로야구 롯데 팬들이 사직구장에서 ‘제발안타’라고 쓴 수건을 들고 응원하고 있다. 롯데는 팀 타율이 후반기에 꼴찌로 떨어지면서 12연패를 당했다. 롯데 자이언츠 제공
프로야구 역사상 한 시즌에 11연패 이상을 하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올해 롯데 팬들은 확률 ‘0%’를 응원하고 있는 셈이다. 12연패 뒤 2연승을 한 롯데는 27일 경기 전까지 단독 4위(60승 57패 5무)에 자리하고 있다. 박 원장은 “이성적 관점에서 롯데라는 팀은 응원하기 쉽지 않은 팀이 맞다. 사실 (이기는 팀에) 돈을 걸라면 롯데에 거는 미친X은 없을 것”이라면서 “하지만 그럼에도 롯데를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건 ‘이렇게 못난 팀도 노력하고 성장하는데, 나도 할 수 있다’는 공감이 아닐까”라고 했다.

주식 투자 실패 이후 우울증에 시달렸던 경험이 있는 박 원장은 “롯데 선수가 바보 같은 실책을 저지르는 걸 볼 때면 주식으로 망했던 내가 떠오른다. 팬들이 롯데에 바라는 것 역시 버티면서 티끌만큼이라도 발전하는 모습이다. 그게 곧 우울을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했다.

“살면서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인생은 계속되잖아요. 롯데 팬도 계속 우승을 꿈꿀 수 있어요. 실패하더라도 늘 새롭게 성장할 수 있다는 마음을 주는 것. 그게 스포츠와 야구, 그리고 이 팀의 매력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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