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워드 갤러리에 전시된 ‘After Bruno Taut (Devotion to drift)’ (2013). 사진 김민 그녀의 관심은 더 넓은 범위로 확장해 시스템과 문명의 취약함을 고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거대 서사(mon grand recit)’ 연작이 대표적입니다. 역사 속 사람들이 꿈꾼 유토피아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은 멀리서 보면 완벽하고 아름답지만, 자세히 보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세계를 표현합니다.
이런 탐구를 구체적으로 전개한 작품은 ‘천지(Heaven and Earth)’입니다. 한국인이 신성하게 여긴 백두산 ‘천지’를 제목으로 한 이 작품의 형태는 타일 욕조입니다.
욕조 가장자리를 산맥이 에워싸고 있어 욕조가 천지 호수처럼 보이지만 그 안엔 검은 물이 가득합니다. 이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암시입니다. 박종철 사건은 독재를 억지로 이어가려던 정권을 무너지게 한 도화선이 된 사건으로, 개인의 탐욕과 오만함이 만든 허술한 시스템은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고층 빌딩과 복잡한 도로가 얽힌 도시를 표현한 작품들을 통해 작가는 과학 기술과 진보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도 돌아보게 합니다.
헤이워드 갤러리 개인전 전시장 모습. 사진 김민 일련의 작업과 최근 메트 프로젝트까지 이불이 꾸준하게 보여주는 키워드는 바로 모순입니다.
지금 세계를 지배하는 플라톤 중심적 사상의 뿌리는 세상 많은 일을 정해진 ‘개념’에 고정해서 이해하려 합니다.
이런 사고가 인류에게 엄청난 발전을 가져다준 것은 분명하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강한 것이 때로 놀랍도록 허약하고, 추하다고 여긴 것이 때로는 눈부시게 아름다우며, 틀렸다고 믿은 것이 오늘은 정답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객관식 시험 답안지에 자신을 욱여넣고, 자라서도 ‘정답’이라고 믿는 것을 벗어나길 두려워하며 자신을 바늘로 찌르는 사람들에게 이불의 작품은 말합니다.
우리가 만든 감옥을 비집고 나가보자고. 인간이 사는 세상은 모순 덩어리라서 아름다운 것이라고.
Long Tail Halo: The Secret Sharer II, 2024. Courtesy the artist. Image credit: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Photo by Eugenia Burnett Tinsley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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