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아파트 상가 건물 옆에 널려있던 초록색 비닐봉지들이 무언가 움찔거리는 낌새가 느껴졌다. 발걸음을 멈추자마자 작고 잽싼 것들이 갑자기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참새들이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도시의 참새들이란 본래 작은 덤불 속에 알알이 열매처럼 맺혀 사춘기 소녀들처럼 지저귀거나, 감전 걱정도 모른 채 전깃줄에 옹기종기 매달려 짹짹대는 존재 아니던가. 그런데 고양이도 아니고, 참새와 쓰레기 봉지라니, 아마도 잘못 보았겠지.
담벼락에 올라앉았던 참새들이 잘 보란 듯 다시 쓰레기 봉지로 떨어지듯 날아돌아왔다. 조그만 부리로 질긴 비닐을 쪼아서 뜯은 걸까. 어쩌다가 뜯긴 틈새를 파고든 걸까. 벌레도 곡식 낟알도 아닐 것이 분명한 것을, 땟국물에 전 참새들은 부지런히 주변 눈치를 보며 쪼다가 도망쳤다가 돌아와 쪼길 반복했다.
인스타그램 화면을 훑어내리던 엄지손가락이 멈췄다. 화면 안에는 역시 참새가 있었다. 주홍빛으로 탐스럽게 익은 홍시 하나에 고개를 파묻고 정신없이 쪼는 세 마리. 달콤한 오찬을 즐기는 녀석들 뒤에는 역시나 밋밋하기 그지없는 무채색 아파트 건물이 있었다.
따뜻한 햇살 아래서 까치밥을 쪼던 참새들을 보며, 나는 대책 없이도 옆 단지의 쓰레기 참새 떼를 떠올렸다. 연달아 이어지던 생각의 고리는 “유해 조수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지 마세요!”라고 경고하던 현수막이, 길고양이를 돌보는 캣맘에 으레 따라붙는 신고, 민폐, 참교육 같은 위협적 단어들에서 멈춰 섰다.
작은 새라고 가엾이 여길 게 아니라고, 가혹해 보일지언정 동물을 사람 손에 의존하게 만들면 악순환일 뿐이라고 난 생각해 보았다. 약육강식에서 밀려난 동물이 굶주리고 병들어 죽는 것 또한 자연의 섭리라고도 열심히 생각해 보았다. 섭리를 운운하다가도 자꾸만, 생각은 처음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인간이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그 섭리를 따르지 않는 종이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나는 근엄한 자연의 섭리와 미안한 인간의 마음을 절반씩만 섞어보기로 했다.
때가 되면 높은 곳부터 익어가는 감을 “높아서 따기 힘들다”며 집집마다 몇 알씩 남겨두는 까치밥, 아니 참새밥을 흉내 냈다. 냉장고에서 며칠을 잠들어 반쯤 말랑해진 단감 한 알과 물그릇을 베란다 난간에 매달았다. 언제나 사람들 곁에 사는 새 치고는 너무나 겁이 많고 작은 존재들이 배불리 먹진 못하더라도 목은 축이고 입가심이라도 할 수 있길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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