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3일 입춘날. 서울 종로구 서순라길 129번지에 있는 갤러리 술라에서 열리고 있는 권도경 작가의 캘리그라피 전시회 ‘일잔춘몽(一盞春夢)’을 보러갔습니다.
전직 광고 카피라이터 출신인 권 작가는 독학으로 연마한 수묵 캘리그라피 작품을 선보이는데요. 직접 쓴 시적(詩的)인 문구가 감상자의 마음을 흔드는 작가입니다. 보통 캘리그라피는 위대한 성현(聖賢)의 말씀이나 경구, 시인의 감성적인 싯구를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작가가 직접 시적인 문구를 창작해 그림과 함께 캘리그라피 작품으로 내놓는다는 점에서 권 작가의 매력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이날 권작가가 보여준 입춘첩은 카피라이터로서의 그의 재치와 유머를 한 눈에 보여주는 새봄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이란 문구를 살짝 비틀어 ‘우리모두 다잘대길’이라고 쓴 그의 글씨에 모두 함박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일잔춘몽의 뜻은 바로 ‘한잔 술을 마시면서 꾸는 봄날의 꿈’입니다. 권도경 작가의 작업실은 낙원상가 꼭대기 층에 있습니다. 지하에는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가성비 좋은 막걸리집도 있고, 지상에는 악기상가로 유명한 바로 그 종로 탑골공원 뒷쪽 낙원상가입니다. 그의 작업실에 한번 놀러간 적이 있습니다.
붓글씨를 쓰는 작업실 방은 따로 있고, 그 앞에 있는 거실 방은 어두침침하지만 분위기 좋은 막걸리 술집을 연상케합니다. 카운터에서 뚝딱 음식을 만들어옵니다. 사가지고 간 서울 장수막걸리 몇 통을 비닐봉지에서 꺼내니 금세 술상이 차려집니다.
벽에 놓인 술병들엔 그가 직접 휘갈겨 쓴 캘리그라피 작품으로 된 라벨이 붙어 있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그가 술을 마시면서 친구를 사귀고, 인연을 맺고, 사유를 했던 흔적들이 글과 그림으로완성됐습니다. 작품 속엔 그의 술에 대한 철학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한번도 그림을 배운 적이 없는 그가 붓을 잡고 그려낸 그림은 선화(禪畵)입니다. 단순화된 꽃과 나무, 술잔, 사람, 그리고 집과 불상…. 스윽스윽 그린 그의 그림은 쉽게 다가오지만, 깨알처럼 써내려간 글씨는 읽고 또 읽게 됩니다.
직장생활하면서 매번 소주, 양주, 맥주를 섞은 폭탄주만 즐기던 제가 프랑스 파리에 연수갔을 때 이렇게 맛있는 와인과 다양한 향기의 맥주가 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왜 나는 맛없는 폭탄주만 마셨을까 후회하는 시간이었죠. 양보다는 향으로 마시는 술. 진정 고수의 경지입니다.
“술은 밥이 되고 약이 된다. 막걸리는 밥과 같은 술이라 장복해도 해로움이 없다. 소주는 약과 같아서 과용하면 안먹은 것만 못하다. 모든 술은 잘 먹으면 묘약이요 잘못 먹으면 해독약 없는 천하의 맹독이다.”
과연 막걸리는 해로움이 없을까요? 음… 과용하면 맹독이라는 점은 모든 술이 공통점인 듯합니다. 권 작가의 작업실은 찾아오는 손님 마다않고, 권하는 술 마다하지 않는 공간입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아침에 수영을 다녀와서 맑은 정신에 일용할 숙제하듯이 하루에 한두편씩 작품을 만들어낸다고 하는군요. 그의 입춘첩처럼 우리모두 다 잘되길! 희망을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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