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모두 다잘대길…권도경의 ‘일잔춘몽’[전승훈의 아트로드]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2월 5일 16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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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지난 2월 3일 입춘날. 서울 종로구 서순라길 129번지에 있는 갤러리 술라에서 열리고 있는 권도경 작가의 캘리그라피 전시회 ‘일잔춘몽(一盞春夢)’을 보러갔습니다.

전직 광고 카피라이터 출신인 권 작가는 독학으로 연마한 수묵 캘리그라피 작품을 선보이는데요. 직접 쓴 시적(詩的)인 문구가 감상자의 마음을 흔드는 작가입니다. 보통 캘리그라피는 위대한 성현(聖賢)의 말씀이나 경구, 시인의 감성적인 싯구를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작가가 직접 시적인 문구를 창작해 그림과 함께 캘리그라피 작품으로 내놓는다는 점에서 권 작가의 매력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이날 권작가가 보여준 입춘첩은 카피라이터로서의 그의 재치와 유머를 한 눈에 보여주는 새봄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이란 문구를 살짝 비틀어 ‘우리모두 다잘대길’이라고 쓴 그의 글씨에 모두 함박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권도경 작가의 입춘첩 ‘우리모두 다잘대길’.
22일까지 계속되는 권 작가의 전시회의 제목은 ‘일잔춘몽(一盞春夢)’입니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 아님에 주의해야 합니다. 일장춘몽은 ‘한바탕의 봄꿈처럼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일잔춘몽’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술한잔에 봄, 술한잔에 여름, 술한잔에 가을, 술한잔에 겨울, 술한잔에 오욕과 술한잔에 칠정을 담습니다. // 술한잔 마시니 하루가 가고, 붓질 한번에 봄날이 갑니다. 술한잔이 일생입니다. 인생 ‘일잔춘몽’입니다.” (권도경 작가 전시회 ‘일잔춘몽’ 초대글에서)

그렇습니다. 일잔춘몽의 뜻은 바로 ‘한잔 술을 마시면서 꾸는 봄날의 꿈’입니다.
권도경 작가의 작업실은 낙원상가 꼭대기 층에 있습니다. 지하에는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가성비 좋은 막걸리집도 있고, 지상에는 악기상가로 유명한 바로 그 종로 탑골공원 뒷쪽 낙원상가입니다. 그의 작업실에 한번 놀러간 적이 있습니다.


붓글씨를 쓰는 작업실 방은 따로 있고, 그 앞에 있는 거실 방은 어두침침하지만 분위기 좋은 막걸리 술집을 연상케합니다. 카운터에서 뚝딱 음식을 만들어옵니다. 사가지고 간 서울 장수막걸리 몇 통을 비닐봉지에서 꺼내니 금세 술상이 차려집니다.

벽에 놓인 술병들엔 그가 직접 휘갈겨 쓴 캘리그라피 작품으로 된 라벨이 붙어 있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그가 술을 마시면서 친구를 사귀고, 인연을 맺고, 사유를 했던 흔적들이 글과 그림으로완성됐습니다.
작품 속엔 그의 술에 대한 철학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한번도 그림을 배운 적이 없는 그가 붓을 잡고 그려낸 그림은 선화(禪畵)입니다. 단순화된 꽃과 나무, 술잔, 사람, 그리고 집과 불상…. 스윽스윽 그린 그의 그림은 쉽게 다가오지만, 깨알처럼 써내려간 글씨는 읽고 또 읽게 됩니다.


“수작(酬酌)은 주객이 서로 권하며 술을 마시는 것.
받은 잔은 되돌려주고 서로 권하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받은 잔은 채워서 돌려주고 받은 사랑도 가득채워 되돌려 주자.
주거니 받거니 나누며 살자.
귀한 인생 개수작말고, 수작하며 살자.
아름다운 세상이다.”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수작’이란 말에 이른 뜻이 있었군요. 서로 주고받는 아름다운 수작을 하며 살아야 할텐데… 적어도 개수작을 하면서 살아선 안되겠습니다.


“參酌(참작)은 상대의 주량을 헤아려
술을 알맞게 따라주는 것이다.
술이 약한 벗에게는 잔을 가득 채우지 않고
조금만 따르는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체질과 기질이 다르다.
그 다름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낙원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정상을 참작하다’할 때 쓰는 ‘참작’이란 말도 술자리에서 나온 말이었군요. 참작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이리저리 비추어 보아서 알맞게 고려함’으로 나옵니다. 상대방의 주량을 고려해 술잔을 따라주는 것. 그럿이 바로 참작이었군요.

“흔들리지 않고 고요해야 맑은 청주를 얻을 수 있지만
청주는 반드시 흔들리고 뒤섞이는 질풍노도의 시기
탁주를 거친 후에야 닿을 수 있는 경지이다.
잘익은 사람은 청주처럼 맑고 향기롭다.”


“하수는 양으로 먹고
고수는 향으로 마신다.”

직장생활하면서 매번 소주, 양주, 맥주를 섞은 폭탄주만 즐기던 제가 프랑스 파리에 연수갔을 때 이렇게 맛있는 와인과 다양한 향기의 맥주가 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왜 나는 맛없는 폭탄주만 마셨을까 후회하는 시간이었죠. 양보다는 향으로 마시는 술. 진정 고수의 경지입니다.


“사람의 겉을 보려면 그 사람의 몸을 보고
속을 보려거든 함께 술을 마셔보라.”

도경 작가의 그림에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나오는 집 그림이 들어가 있습니다. 집 안에는 조그만 상을 놓고 술을 나눠 마시는 친구가 있고요.


“같은 시간이 흘러도 부패하는게 있고
발효하는 것이 있다.
한 시대를 살면서도 구태에 갇힌 사람이 있고
새시대를 여는 사람이 있다.”

술은 곡식이 발효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음료로 다시 탄생합니다. 발효하지 못하는 술은 부패하고 말지요. 향기로운 음료로서, 창조적인 영감을 주는 매개체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려면 잘 익어야 하겠지요.


“술은 밥이 되고 약이 된다.
막걸리는 밥과 같은 술이라
장복해도 해로움이 없다.
소주는 약과 같아서
과용하면 안먹은 것만 못하다.
모든 술은 잘 먹으면 묘약이요
잘못 먹으면 해독약 없는
천하의 맹독이다.”

과연 막걸리는 해로움이 없을까요? 음… 과용하면 맹독이라는 점은 모든 술이 공통점인 듯합니다. 권 작가의 작업실은 찾아오는 손님 마다않고, 권하는 술 마다하지 않는 공간입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아침에 수영을 다녀와서 맑은 정신에 일용할 숙제하듯이 하루에 한두편씩 작품을 만들어낸다고 하는군요.
그의 입춘첩처럼 우리모두 다 잘되길! 희망을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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