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과학’ ‘행성’ ‘자연’… 누가 만든 말이지?

  • 동아일보

코멘트

◇과학 용어의 탄생/김성근 지음/372쪽·2만42000원·동아시아


만약 조선시대 사람에게 ‘과학’이라는 단어를 말한다면 잘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당시 과학은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한 학문(과거지학·科擧之學)을 뜻했다. 보편적 진리나 법칙 발견을 목적으로 하는 지식을 뜻하는 현재의 ‘Science(사이언스)’와는 의미가 달랐다.

오히려 사물의 이치를 탐구해 지혜에 이른다는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오늘날 과학의 뜻에 가까웠다. 한국어 문헌으론 1895년 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과학’이라는 말을 처음 썼고, 이 밖에도 박학(博學), 학술, 지식 등 다양한 단어가 ‘사이언스’의 번역어 자리를 놓고 경쟁하다가 1910년대 전후로 과학이 자리 잡게 된다. 1914년 간행된 대중잡지 ‘청춘’에서 과학은 “만유(萬有)의 일부분인 생물계, 정신 현상을 탐구하는 것”으로 정의됐다.

일본 도쿄대에서 과학기술사를 공부하고 전남대 자율전공학부 교수로 있는 저자가 오늘날 과학과 관련된 주요 어휘 17개의 유래를 다뤘다. 자연, 철학, 주관·객관, 물리학 등 모두 자주 쓰지만 뜻을 명쾌히 설명하기 쉽지 않은 단어들이다. 저자는 “언어는 사유의 창”이라며 “만일 우리가 이 어휘를 물려받지 않았다면 우리의 질문은 어떻게 달라졌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책엔 치열한 과학 용어의 경쟁 과정이 서술돼 있다. ‘Planet(플래닛)’은 한국에선 ‘행성(行星)’으로 번역되지만, 일본에선 ‘혹성(惑星)’이다. 일본은 ‘방황하다’, ‘길을 헤매다’는 뜻을 가진 ‘혹’을 사용했다. 반면 한국에서는 이 글자를 ‘미혹되다’라는 의미로 많이 쓰기 때문에 ‘간다’는 뜻의 ‘행’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게 저자의 의견이다. 각 나라의 문화에 따라 저마다의 이유로 과학 용어가 만들어지고, 대중화되는 과정이 흥미롭다.

저자는 지금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쓰는 어휘의 변천을 거슬러 올라가며 뿌리를 집요하게 찾아낸다. 이는 단순히 언어의 옛 모습을 나열하는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공유하는 인식과 사고의 근원에 대한 지적 탐구에 가까워 보인다.

#과학#과학 용어#어휘 유래#언어#지적 탐구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