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2월 26일 개봉한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A Complete Unknown)’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밥 딜런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을 보러 가는 사람 중 밥 딜런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반전과 평화를 노래하던 그는 1960년대 미국 히피 문화의 얼굴이자 목소리였다. 다정하지는 않지만 따뜻한, 자신의 목소리를 닮은 노랫말로 사람들을 위로한 밥 딜런은 2016년 뮤지션으로 처음 노벨 문학상도 받았다.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극장을 나서는 길. 그런데 이제는 밥 딜런을 모르겠다. 2시간 21분 동안 밥 딜런의 이야기를 봤는데도. 그를 모른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제야 그 유명한 사람을 그 유명한 사람이 연기한 이 영화 제목이 왜 ‘컴플리트 언노운(완전히 낯선)’인지 알 것도 같다.
영화는 기타 하나 메고 무작정 우디 거스리를 찾아 뉴욕에 온 스무 살 밥 딜런으로 시작된다. 우디 거스리는 더스트볼(Dust Bowl·1930년대 미국 먼지 폭풍과 그로 인한 피해를 통칭하는 말)을 위로하는 노래로 사랑받았던 가수지만 지금은 병으로 쇠약해져 있다. 이따금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주기 위해 만든 명함 뒷면에 ‘아직 죽지 않았다(I ain’t dead yet)’라고 적어야 할 만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밥 딜런은 우디 거스리를 위해 썼다며 ‘우디를 위한 노래(Song to Woody)’를 바친다.
영화는 여전히 기타 하나 멘 채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는 스물넷 밥 딜런으로 끝난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 역시 우디 거스리다. 아무개와 다름없던 첫 만남 때도 자신이 만든 노래를 불렀던 밥 딜런이지만 세상 사람 모두가 자신을 아는 유명인이 된 이 마지막 만남에서 그가 부른 노래는 우디 거스리의 ‘먼지투성이인 오랜 먼지-그간 함께 해서 좋았네(Dusty Old Dust—So Long, It’s Been Good to Know Yuh)’였다.
밥 딜런이 우디 거스리를 처음 만났을 때 받았던 ‘아직 죽지 않았다’고 쓰여 있던 명함의 앞면에는 ‘우디—먼지폭풍에서 가장 먼지를 많이 뒤집어쓴 사람(Woody —The Dustiest of the Dustbowlers)’라고 적혀있었다. 이 노래가 곧 우디 거스리라는 의미다.
반면 마지막 만남 당시 밥 딜런은 신곡 ‘구르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에서 일렉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라 정통 포크씬에서 배신자라는 비판을 듣던 때였다. 누군가는 변절이라 손가락질했고, 누군가는 또 마침내 자유를 얻어냈다며 축하했다. 어느 곳에서도 구속받기를 원치 않았던 밥 딜런은 그래서 그의 영웅 우디 거스리처럼 단 한 곡으로 규정될 수 없는 사람이다.
새로운 시대를 향해 떠나며 밥 딜런은 자신의 어린 시절, 그 시대를 지배했던 우상에게 ‘먼지투성이인 오랜 먼지-그간 함께 해서 좋았네(Dusty Old Dust—So Long, It’s Been Good to Know Yuh)’를 부르며 작별 인사를 갈음했다. 이보다 더 격식을 차린 인사는 찾기 어려웠을뿐더러, 이보다 그의 마음을 잘 대변하는 가사도 찾기 어렵지 않았을까.
Don‘t ask for the moon. We have the stars.
달을 바라지 마. 우리에겐 별이 있잖아.
영화 속 밥 딜런은 결국 매 순간 진심을 담은 노랫말 때문에 여자 친구 실비 루소도 잃는다. 정작 진짜 바람을 피웠던 순간에는 어리숙한 거짓말에도 쉽게 속아 넘어가던 허술한 여자 친구였다. 하지만 정작 다 끝난 뒤, 바람피웠던 상대와 느꼈던 감정을 담아낸 노래를 듣는 순간 여자 친구는 곧바로 눈물을 쏟는다.
붙잡는 밥 딜런에게 여자 친구는 “달을 바라지 마. 우리에겐 별이 있잖아.(Don‘t ask for the moon. We have the stars.)”라고 답한다. 둘이 처음 데이트 했던 날 봤던 영화 ‘나우, 보이저(Now, Voyager)’에서 나왔던 대사다. 당시 영화 속 주인공이 어머니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며 여자 친구는 ‘자신을 찾았다’고 하지만 밥 딜런은 ‘찾은 게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된 것뿐’이라고 반박한다. 여자 친구는 ‘다른 무언가’ 앞에 ‘더 나은(better)’을 붙이지만, 밥 딜런은 다시 ‘더 나은’을 뺀 ‘다른 무언가’라고 강조한다.
영화 속 밥 딜런은 그렇게 자신의 여정에서 만난 이들과 처음과 끝, 다시 처음을 맞는다. 그리고 그건, 그의 주장에 따르면, ‘다른 무언가’가 되는 일일 뿐이다. 꼭 ‘더 나은’이어야만 하는 지는 그에겐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운명의 장난인지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시상식에는 ‘선약이 있다’며 불참했던 밥 딜런이 노벨위원회에 보낸 수락 연설문에도 ‘달’이 등장한다.
“누가 내가 노벨문학상을 탈 가능성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고 했다면, 나는 그 확률이 아마 달에 서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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