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지구서 사라진뒤… 불길함 혹은 쓸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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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위그 개인전 ‘리미널’
최근 10년간 만든 작품 12점 공개
서울 리움미술관서 7월6일까지

피에르 위그의 영상 작품 ‘휴먼 마스크’(2014년). 리움미술관 제공
피에르 위그의 영상 작품 ‘휴먼 마스크’(2014년). 리움미술관 제공
현대 미술가 피에르 위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휴먼 마스크’는 인간의 가면을 쓴 원숭이가 주인공이다. 긴 머리카락 가발을 쓰고 치마를 입고 있어 뒷모습만 보면 체구가 작은 소녀 같지만 팔과 다리엔 털이 수북하다. 이 원숭이가 돌아다니는 곳은 원전 사고로 황폐해진 일본 해안 도시 후쿠시마의 어느 식당. 그 안에서 원숭이는 훈련 받은 대로 부엌과 식탁을 오가며 의미 없는 일을 하거나 가만히 허공을 응시한다.

‘휴먼 마스크’를 비롯해 위그가 최근 10여 년간 제작한 작품 12점을 공개하는 전시 ‘리미널(Liminal)’이 지난달 27일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개막했다. 사람과 비슷하지만 사람이 아닌 원숭이처럼, 위그는 인간이 되려다 만 ‘이상하고 아름다운 괴물들’을 작품 속에 펼쳐 놓았다. 전시 제목 ‘리미널’은 “생각지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를 일컫는다.

작가는 전시장 입구에 임신한 사람의 배를 본뜬 조각 작품(에스텔라리움)을 놓아뒀다. 앞으로 관객이 보게 될 작품들이 온전한 형태가 아닌, 배 속에서 무언가로 변하고 있는 ‘중간 상태’의 것들임을 암시한다. 이어 전시 제목과 같은 영상 작품(리미널)이 보이는데, 얼굴이 텅 빈 사람의 형체가 등장한다. 이 형체는 전시장에 설치된 센서가 감지하는 데이터에 따라 움직임이 조금씩 달라진다.

다른 대부분의 작품들도 정해진 서사 없이 전시 기간 수집되는 데이터에 따라 변화하는 형태로 제작됐다. 전시를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 쓰고 걸어 다니는 금색 마스크 ‘이디엄’에도 센서가 달려 있다. 마스크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하는 듯 기존 언어가 아닌 소리를 만들어낸다.

전시 소개 서문은 ‘변화’라는 설정을 강조하지만, 작품과 전시장이 빚어내는 불길하고 쓸쓸한 분위기도 흥미롭기가 그 못지않다. 앞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어둡게 만들어진 1층 블랙박스 전시장 한쪽 수조에는 콩스탕탱 브랑쿠시(1876∼1957)의 조각을 본뜬 얼굴 형상을 등껍데기 대신 메고 있는 소라게가 걸어 다닌다. 브랑쿠시의 조각조차도 소라게에겐 다른 소라 껍데기와 같은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지하 1층 전시장의 대형 영상 작품 ‘카마타’는 흙 바닥에 놓인 해골을 기계가 관찰하는 모습을 담았다. 그런데 그 해골의 형상이 바닥을 향해 쓰러진 듯 엎드리고 있어, 화산재가 덮친 폼페이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언젠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난 뒤 그 흔적만 남은 세계를…. 7월 6일까지.

#피에르 위그#개인전#리미널#휴먼 마스크#전시#서울 리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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