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3월의 마치’는 기억을 잃어가는 주인공의 내면 세계를 가상현실 무대 위에서 심리극처럼 그려낸다. 정한아 작가는 “한 인간이 어떻게 괴물이 됐나를 유년기부터 추적하고 그 궤적을 바라보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며 “상처와 치유, 상실의 애도가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인 것 같다”고 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소설가 정한아가 이달 펴낸 장편소설 ‘3월의 마치’는 ‘역주행 작품’으로 유명해진 전작 ‘친밀한 이방인’ 이후 8년 만에 선보인 신작이다. ‘친밀한 이방인’이 수지, 정은채 등이 출연한 드라마 ‘안나’의 원작소설로 뒤늦게 큰 화제가 됐던 만큼 차기작에 대한 관심도 컸다.
‘3월의 마치’는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흡인력 강한 스토리텔링을 보여준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성공한 노년의 여배우 ‘이마치’가 아파트 각 층마다 살고 있는 다른 나이대의 자신과 마주치며 망각한 고통스러운 가족사와 대면한다는 줄거리다.
4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작가는 “어느 날 여러 연령대의 내가 집으로 나를 찾아오는 꿈을 꿨다. 그 꿈이 아파트의 각 층마다 지나온 시절의 내가 살고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연결이 되며 이야기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거짓말’이라는 전작의 화두는 이번 소설로도 이어진다. 여성스러움을 과시하지만 모든 게 거짓이었던 안나처럼, 이마치 역시 가짜 삶을 연기한다. ‘국민 어머니’로 불리지만, 사실상 어머니로서는 실패했다. 기지촌에서 자라며 부모에게 방임·학대당한 상처를 자녀들에게 대물림한다.
이마치의 실패한 모성에서 보듯, 차용되고 학습된 ‘가짜 여성성’이란 화두는 두 아이를 키우며 작가로서의 삶을 병행하고 있는 정 작가 자신이 10년에 걸쳐 몸으로 부딪혀 온 주제다. 대학교 4학년 때 등단한 뒤 여러 문학상을 받으며 일찌감치 주목받는 20대 작가로 활약했지만 30대 결혼과 육아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가로막히는” 순간을 경험했단다. “어머니 되기란 게 꿈과 경력, 자신이 부서지는 일이라면 그 의미는 어디에 있는지 오래 고민했다”고 한다.
소설 ‘친밀한 이방인’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안나’의 한 장면. 쿠팡플레이 제공특히 이 두 작품을 쓸 때 그런 고민이 정점에 있었다. 육아로 경력이 단절되며 내면이 망가진 소설가가 화자인 ‘친밀한 이방인’은 작가가 둘째를 출산한 뒤 조리원에서 교정을 봤다. ‘3월의 마치’ 초고는 첫째 초등학교 입학 전 사력을 다해 완성했다. “일단 애가 학교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주변 말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원고를 두 번이나 엎으며 완고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다. 정 작가는 “엄마의 흠까지 사랑해주는 아이들을 보며 결말이 소화될 만큼 숙련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고 했다. 그에게 ‘친밀한 이방인’이 모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 작품이었다면, 이 책은 그에 대한 나름의 답신이다.
생활의 한계와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놓고 오래 씨름했지만, 이 소설을 쓴 뒤엔 “이젠 이 고민을 놔줄 때”란 생각이 들었단다. 오랜 고민의 해답이자 소설의 정점이 될 반전은 맨 마지막에 확인할 수 있다. 작가는 “엄마의 다른 이름은 ‘사랑받은 존재’이고, 이 소설도 결국 그에 대한 이야기”라고 힌트를 줬다.
정 작가를 대중에게 각인시키게 된 데는 드라마 ‘안나’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운이 참 좋았다”고 했다. 이주영 감독이 원작 소설에 대한 애정이 컸고, 계절마다 만나서 제작 상황을 공유해주며 친구처럼 친해졌다고 한다.
“책마다 운명이 있다고들 하는데 그게 그 책의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하고 잔치 같은 일이었지만, 결국 책 ‘외부의 일’이라고 느꼈어요. 소설 안에서 완전한 이야기, 소설의 화법에 맞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저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 작가는 “문학적 야심, 작가로서의 야망 같은 거 다 내려놨다. 오늘 하루 내가 만족하는 소소한 글쓰기를 하는 지금이 되게 행복하다”며 “이제 또 다른 이야기가 날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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