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볕이 돌이라도 녹일 듯 내리쬐던 재작년, 서울을 비롯한 온 나라가 의열단 사건으로 들끓었고 김한 씨는 그 격랑 속에서 5년의 형기를 선고받고 차디찬 감옥에 갇혔습니다. 기자는 김한 씨의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서울 시외 공덕리 224번지 허름한 초가집. 남은 가족들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등불을 밝히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습니다.
김한 씨의 노모 이씨는 예순여덟입니다. 백발이 성성했으나 여전히 꼿꼿했고, 젊은 시절의 고운 자취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녀의 곁에는 며느리 배 씨가 있었습니다. 올해 서른여덟, 남편보다 한 해 아래입니다. 배 씨는 두 딸을 품에 안고, 그리움을 삼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큰딸 원정(元貞)은 이화학교 보통과 6학년에 다니고, 작은딸 예정(禮貞)은 아홉 살입니다.
갑자기 김한 씨가 잡혀간 이후, 네 식구는 의지할 곳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배 씨의 삶은 하루아침에 바뀌었습니다. 생계를 위해 그녀는 십 리 밖 용산의 고무 공장에 나갔습니다. 아침 여섯 시에 나서서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습니다. 날마다 손에 굳은살이 박히고 몸은 점점 쇠약해졌지만, 그녀는 남편의 사식을 마련하고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습니다. 곱던 얼굴은 고생의 흔적으로 마르고, 눈은 피로에 짓눌려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남편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감옥에서 먹는 거친 콩밥, 그리고 딸들이 아버지를 찾으며 우는 모습이 떠올라, 그녀는 매일같이 눈물을 삼켰습니다.
늙은 어머니 이 씨는 그런 며느리를 애처롭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녀는 조석으로 조밥을 지으며 어린 손녀들을 돌보았습니다. 작은딸 예정은 학교에서 공부를 배우면서도 때때로 아버지를 찾으며 울곤 했습니다. 원정이는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던 딸이었습니다. 두 달에 한 번 오는 면회와 편지는 이들의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 김한 씨가 동경으로 증인으로 불려간 후 소식이 끊긴 지도 오래입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가 조선으로 돌아와 다시 면회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그들의 집은 희미한 등잔불 하나에 의지했습니다. 낡고 허름한 방은 겨울이면 얼음장처럼 차가웠습니다. 그런 삶 속에서도 이 씨는 기자를 향해 말했습니다.
“이렇게 궁한 우리를 찾아주어 고맙소. 늙은 몸이 그날까지 살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며느리를 생각해서라도 하루라도 더 버텨야지요. 가끔 가슴이 미어질 때도 많지만, 참고 또 참습니다. 어린 손녀들이 아버지를 찾으며 우는 모습을 보면, 이 원수 같은 세상을 원망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습니다. 이토록 가난하고, 이토록 외로운 가정. 하지만 그들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라는 이름을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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