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 계수 최씨 부인의 애화
● 1부 (1925년 4월 10일자 동아일보 기사)
◇ 자유로운 땅을 찾아 정처없이 떠나
북만주 하얼빈역에서 한번 울린 피스톨의 음향과 함께 교수대 위에서 원한의 눈물을 뿌리고 한 방울 이슬이 된 안중근(安重根)은 4형제인데, 셋째 동생인 봉근(奉根)씨는 큰 형님의 원한 깊은 죽음과 둘째 형님 명근씨의 5년 간의 철창 생활 모든 것이 가슴에 불이 붙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봉근씨는 모든 불합리한 비분 원한을 가슴에 품고 자유가 없는 땅을 벗어나자는 유지대로 『민족을 위하여』라는 굳은 결심으로 사랑하는 아내 최씨 부인(30세)과 당시 5세부터 한 살 된 아들까지 삼형제를 쪽박에 밤 쏟듯이 남겨 두고 정처없는 발길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봉근 씨가 임금 같이 붉고 통통한 어린 뺨 위에 주먹같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석별의 애타는 키스를 어린 이마에 던진 후에 의지할 곳 없는 젊은 부인과 다시 성공하는 날을 굳게 언약하고 떠난 지 10여 년이 지나도 다시 그의 얼굴은 지금까지 고향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 기러기 나는 계절이면 베게에 떨어지는 눈물
봉근씨를 떠나 보낸 최씨 부인은 굳은 의지를 가진 이로 남편과 같이 즐기던 고향 해주(海州) 땅에서 다시 만나겠다는 결심으로 어린 아들 3형제를 거느리고 짤막짤막하게 전하는 소식을 더 없는 낙으로 삼으며 2,3년간은 두고 간 재산으로 어렵지 않게 생활을 하였습니다. 날이 가고 밤이 가면서 청춘에 끝없는 정서를 풀 곳이 없고 오직 가을 하늘에 짝 잃은 외로운 기러기 날아올 때 청량한 가을 달이 뒷창으로 근심과 초조와 고독과 번민에 찌들어 파리한 그의 얼굴을 비출 때 그는 세상에 고락을 모르는 어린 세 생명의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내는 그 얼굴을 들여다보며 외로운 베게머리에 뜨거운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하며 보통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들들이 작문을 지을 때 아버지를 그리는 글을 지어 가지고 어머니 앞에서 읽을 때 그의 가슴이 메여 터지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그러나 어린 자식의 나날이 느는 재주에 가슴에 막히는 설움이 위로를 받았답니다.
◇ 행상을 떠나 옹기 장사가 되어
그러나 이 불행한 최씨 부인에게는 또 다시 쓴(苦) 운명의 신이 농락의 손을 그 머리 위에 내렸습니다. 그것은 아무 직없이 없어 수입이 없이 소비만으로 3년이나 쓰고 나니 호구할 방책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할 수 없이 떠날 때 부탁하여 둔 친정되는 해주 서영정에 있는 오라버니의 집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 오라버니는 상당하 재산가로서 불상한 누이 한 사람을 거두지 못할 경우는 아니었으나 세상의 인심은 물욕과 함께 어두어져서 오히려 그 여섯 식구가 그에게는 눈에 가시같기도 하였답니다. 자활(自活)의 정신이 많은 최씨 부인은 그곳에 있음이 심히 괴로웠으나 어린 아들을 학교에 보낼 때 찬밥 덩이라도 한 숟가락씩 먹여 보내기 위하여 모든 굴욕을 무릅쓰고 그 집에 있으면 낮에는 옹기장사 유기장사를 하노라고 연약한 몸에 주린 배를 졸라 매고 동으로 서로 행상하러 다녔답니다. 이리하여 겨우 끼니는 이었으나 그 역시 살 길이 망연하였으므로 눈물을 머금고라도 친가에 기식(寄食)하는 설움을 당치 아니치 못하게 되어 몸이 가루가 되도록 안팎 일을 모조리 보아 주었답니다.
◇안씨 조카라고 간 데마다 내쫓겨
이렇게 지내는 중에 맏아들 창익이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더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도 어머니의 정경을 살펴 어린 몸으로 마음에 없는 재판소에 급사(給使) 노릇을 하며 밤에는 혼자 책을 읽어 수양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만은 재판소에서는 안중근의 조카라는 혐의로 해고를 하여 버렸습니다. 그 후에 또 도청에 들어갔었지만 다시 나오게 되어 창익은 이를 갈고 쓴 눈물을 뿌리며 할 수 없이 손을 맞잡고 집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 최씨는 그래도 어린 목숨을 위하여 친정에서 쌀을 구걸하였으나 두세 번에 응치 않고 나중에는 할 수 없이 호미(胡米)를 주며 다시 오지 못하게 하였음으로 최씨는 이런 창피하고 쓰린 경우를 당함이 한번뿐이 아니었으므로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비분이 세상에 부모동기의 무정을 원망하고 얻은 호미를 내던진 때도 있었답니다.
그 동안 창익은 다행히 경성체신리원 양성소(京城遞信吏員養成所)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되어 상경하게 되었습니다. 홀로 계신 어머니의 슬하를 떠나면서 창익은 일년 후에는 이 괴로움이 적어지리라는 것을 굳게굳게 예약하였답니다.
● 2부 (1925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 어린 아들 창준이가 배고파서 넘어져
이와 같이 창익이가 하루 아침에 불쌍한 어머니와 동생을 두고 간 뒤에 그들의 생활은 더 참담하였습니다. 그 고통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정신적은 물론이지마는 더욱이 물질상으로 심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최씨 부인은 남의 빨래를 빨고 또는 남의 집 곁방 살이를 하여가며 아침저녁으로 연명이나 하여갔습니다. 그러면서도 남편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아들들을 공부시키기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역경에 있는 최씨 부인에게는 다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액상을 당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어떤 하루 날 창준(昌俊)이가 학교에서 우연히 졸도한 일이 있다. 이것은 심한 공복증(空腹症)으로 그윽한 정신에 피로로 인함이었었는데 이와 같이 졸도하매 같은 반 동무 아이들이 이왕부터 마음착하고 공부잘하며 우의가 있는 창준이가 가세가 곤란하여 굶고 다니는 것을 알았으므로 아이들은 일제히 눈물을 흘리며 이 어린 창준이를 구하기 위하여 단돈 몇 십 전씩을 거두기로 하여 붉은 맘에 참된 동정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아이들의 진실된 행동에 그 반 담임 선생도 같이 눈물을 흘리며 그 후부터 자기의 박봉을 뜯어서 어린 창준이의 학비를 돕기로 하였습니다.
◇ 김군의 동정 - 매달 25원씩 보조
이 참상을 들은 해주 식당에 숙수로 있는 김원식(金元植)(20)군은 곧 자혜의원으로 인도하여 치료케 한 결과 곧 다시 소생케 되었습니다. 그 때에 그 어머니 되는 최씨 부인의 맘이야 어떠하였으리오. 졸도하여 죽어 넘어진 아들은 앞에 있으되 돈 한 푼 없어 자기는 꼼짝할 힘이 없고 당장 창준이가 다니는 학교에 교사로 있는 자기의 친정 아버지가 있으되 그 아들과 며느리의 질투가 무서움인지 어떠냐는 말 한마디 커녕 약 한봉지 값도 주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성마리아 앞에서 자기 누이의 장래를 약속하던 소위 지사인 최씨 부인의 오라버니 되는 이는 고개 한 번 기웃하지 않음을 볼 때에 이 금전으로서만 행사하며 돈! 이것만을 아는 자기 오라버니를 원망하는 이보다 이 더러웁고 추악한 세태를 한없이 저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반면에 친분도 없는, 앞에서 말한 김원식 군이 매달 25원이라는 돈으로 가계를 보태어 줌으로 그 식구에게는 한 줄기의 살 길이 비추었습니다.
◇ 없는 자의 설움 - 형제가 남만 못해
이렇게 지내는 동안에 어느 덧 여름이었습니다. 어떤 여학교에서 교수하는 자기의 동생이 오라버니의 집에 돌아와서도 한 고개 넘어 살고 있는 형을 한번도 찾아오지 않을뿐더러 최씨 아들과 오라버니 아들을 길에서 한꺼번에 만나도 최씨 아들은 본 체도 않고 오라비의 아들은 쓰다듬어 만지고 귀여워하는 것을 보았다는 어린 아들 창준의 서러운 사정의 하소연을 들을 때 누구나 다르랴 그의 맘에는 한낱 자식을 사랑하는 맘에 분개한 생각을 금치 못하였으나 오직 쓰린 운명 만을 한탄하였을 뿐입니다. 여름 동안에 친정에 와 있을 때 거기서 울려 나오는 풍금 소리를 들으러 거기로 들어가려하면 문까지 거는 일이 있었답니다. 이 뿐 아니라 그의 친정에서는 개가(改嫁)하라고 자못 성가시게 굴었답니다.
◇ 남편 찾아 상해로 곧 떠날 터이다
이런 가운데서 그의 은인이라 할만한 김군의 도음으로 어린 아이들의 공부를 시키고 지났습니다. 그 기나긴 동안에 한번 간 그의 남편은 소식조차 망연하여 생사까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3년 전에 상해(上海)에서 해주 사람이 그가 기다리는 남편 봉근씨를 만났었는데 그는 자기의 가족을 자기 처남에게 맡기었으므로 아주 안심하더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것을 듣는 최씨 부인의 맘은 더 미여지는 듯 하였습니다. 그 후에 아들 창익이도 상해로 건너간 소식을 들은 최씨 부인은 어린 아들 3형제와 딸 창수(昌壽)를 데리고 좀 더 자유로운 지대로 가서 혹이나 남편을 만날까하는 생각으로 김군과 함께 상해로 며칠 후에 떠날 터이라는데 그 어린 남매들은 수양산 머리에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빨리 떠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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