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필도, 대언도… 결국 나를 고백하는 것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5월 14일 11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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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를 영화로 읊다] 〈106〉 대신 쓴 편지

한시에선 일찍부터 대신 말하기(代言)란 글쓰기 방식을 사용해 왔다. 당나라 때는 이전보다 대신 말하기를 활용한 시가 더 유행했다고 한다. 이상은(李商隱)이 남긴 다음 시도 그런 예 중 하나다.

시인은 애정시에 특히 뛰어났는데, 이 시에선 여성의 목소리를 빌려 사랑하는 이에게 애절한 이별의 아픔을 편지 쓰듯 노래했다. 보통 남에게 보내는 시는 제목에 수신자가 명시되지만, 대신 쓴 작품이기에 어떤 이를 대신해서 누구에게 보낸 사연인지는 알 수 없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그녀’(2013년)에서도 주인공 테오도르가 남편에게 보내는 부인의 결혼 50주년 축하 편지를 대신 쓰는 장면이 나온다. 그의 대필 편지는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부부간의 사랑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듯하지만, 정작 자신은 아내와의 갈등과 소통 부재로 이혼을 앞두고 있다.

영화 ‘그녀’에서 테오도르는 타인을 대신해서 마음을 전하는 손편지를 쓴다. 더쿱 제공
테오도르가 아내와 좋았던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대면하길 주저한다면, 시의 화자는 헤어진 임에 대한 그리움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펴지지 않는 파초잎과 망울을 터뜨리지 못한 정향꽃처럼 맺혀서 풀리기 어려운 근심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독이 이전 영화에서 다른 사람의 의식에 들어가는 대신하기의 설정을 담았던 것처럼(‘존 말코비치 되기’), 시인 역시 다른 시에서 대신 말하기 방식으로 자신의 애정 문제를 읊기도 했다. 시에 나오는 정향나무 꽃망울은 이뤄지지 못한 옛사랑인 유지(柳枝)라는 낙양 아가씨에 대해 읊은 연작시에도 등장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테오도르와 아내는 서로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자신의 입장만 고집하며 대립한다. 영화가 그들의 좁히기 어려운 간격을 보여준다면, 시는 애정의 상징인 봄바람을 매개로 끝내 해소되기 어려운 서로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무리된다.

시의 화자가 높다란 누각에 올라가 보이지 않는 임 생각에 상심한 것과 달리, 테오도르는 건물 옥상에 올라가 황혼에 물들어 가는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며 비로소 아내에게 보내는 자신의 편지를 쓴다. 아내를 자신의 틀에 맞추려 했던 지난날에 대한 반성을 인공지능 사만사와의 가상 관계를 통해 깨닫게 된 것이다. 시인 역시 가공의 상황 속에 자신의 내면을 밀어 넣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 현실 속 자신의 문제를 암시한 것인지도 모른다. 테오도르가 대필한 손편지가 마지막에 자신의 문제에 대한 고백 편지로 이어지는 것처럼, 한시에서의 대신 말하기도 가공의 타인을 경유한 시인 자신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이상#그녀#테오도르#영화#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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