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서울 홍익대 인근의 라이브 클럽 ‘드럭’. 이곳에서 열린 미국 록밴드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1967∼1994) 1주기 추모 공연은 대한민국 음악계에서 인디 문화가 태동한 순간으로 꼽힌다. 흩어져 있던 홍대의 인디 밴드들이 결집해 각자의 존재감을 뿜어냈다.
이 공연에서 무대에 난입해 기타와 앰프를 마구 때려 부순 악동들이 있었다. 바닥 한켠에 쌓인 맥주캔 무더기에 뛰어드는 등 그야말로 ‘난동’을 부렸다. 화가 난 클럽 사장이 “니들, 뭐하는 놈들이냐?”고 물었다. 답은 패기 넘치고 뻔뻔했다. “저희는 밴드에요!” 사장은 고소는커녕 이들에게 오디션을 보게 했다. 그렇게 ‘말 달리자’, ‘밤이 깊었네’, ‘명동콜링’ 등 주옥같은 노래들을 만든 1세대 인디 밴드 ‘크라잉넛’이 탄생했다.
●‘인디의 역사’ 크라잉넛
올해 데뷔 30주년을 맞은 크라잉넛의 역사는 곧 인디의 역사다. 9일 서울 마포구의 합주실에서 만난 멤버들은 “이렇게 오래 활동할 줄 몰랐다”면서도 “인디의 역사를 증언할 수 있는 ‘증언 밴드’가 됐다는 게 뿌듯하다”고 입을 모았다. 초·중·고교 동창인 박윤식(49·보컬, 기타), 이상면(49·기타), 이상혁(49·드럼), 한경록(48·베이스)이라는 초대 멤버에 드럭에서 일했던 ‘공익 형’ 김인수(51·키보드)가 1999년 2집 때 합류한 뒤 한 번도 멤버가 바뀌지 않았다.
오래 합을 맞춘 이들인 만큼 인터뷰는 사실 ‘친구들의 수다’에 가까웠다. 박윤식이 “30년쯤 되면 목소리도 안 나오고, 배 나오고, 머리도 벗겨질 줄 알았는데 아직 괜찮다”며 너스레를 떨자, 이상면이 “덜 벗겨진 거지”라고 응수했다. “1980년대 롤링스톤즈가 미국에서 투어할 때 우리 나라 음악 잡지에 ‘40이 넘어서도 락을 한다’고 했는데 우리는 (뭐지)….” 겸연쩍은 듯한 김인수의 말에 멤버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데뷔 30주년 맞은 인디밴드 크라잉넛.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지금까지도 끈끈한 팀워크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 역시 서로의 성격을 너무 잘 아는 친구사이이기 때문이라고. “오래 해왔기 때문에 어느 부분에서 쟤가 화가 날지를 잘 알아요. 싸워봤자 화해하는 것도 귀찮고, 그냥 안 싸우고 화해도 안 하면 되죠.”(이상혁)
크라잉넛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대형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음악을 만드는 ‘인디펜던트(Independent)’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잘 팔릴 음악보다는 거칠고, 덜 다듬어졌지만 싱그러운 ‘야생화’ 같은 음악 세계를 지켜 온 비결이다. 한경록은 “인디이기 때문에 음악 뿐 아니라 기획, 홍보까지 직접 해야 했다”라며 “이런 경험치가 쌓여 변화에 적응하는 ‘변온동물’처럼 살아남을 수 있는 노하우를 얻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공전의 히트곡 ‘말 달리자’ 역시 야생의 반항기에서 나왔다. ‘음악 좀 안다’ 하는 형님들이 하는 “너희가 하는 건 펑크록이 아니야”라고 훈수에 대해 ‘닥쳐’라고 통쾌하게 응답한 것이다. 이들은 “펑크락 밴드는 공장 노동자여야 하고, 머리는 어때야 한다는 등의 프레임에 갇히기 싫었다”고 회상했다.
●“함께 울고 웃는 노래 만들고파”
지난달 28일 발표한 신곡 ‘허름한 술집’은 20대의 혈기왕성함보단 차분하지만 흥겨운 정서를 담고 있다. “간헐적 단식 해보려는데/동네 친구들이 모여드네” ‘빨간 뚜껑 소주’를 먹던 기찻길 술집 등 멤버들이 30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여러 장소들을 모티브로 만들었다. 뮤직비디오는 홍대 문화공간 ‘제비다방’에서 구형 스마트폰으로 찍어 레트로한 느낌을 더했다. 한경록은 “동네에 오래 있었던 친근한 공간을 ‘허름한 술집’으로 표현한 것”이라며 “이 노래가 퇴근 후 맥주 같은 위로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크라잉넛은 앞으로도 3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홍대의 클럽들과 상생할 수 있는 ‘연중 공연’은 물론, 홍대 갤러리와 협업해 인디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전시도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의 크라잉넛은 어떤 모습일까. 한경록은 “대단한 히트곡보다는 이 시대에 함께 웃고 웃을 수 있는 노래들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일단 30주년 찍었으니 31년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초심을 잃지 않겠습니다.”(이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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