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고시마현 최남단 섬인 요론섬. 요론섬 남쪽 요론성터에 오른 한 남성이 바다를 향해 서 있다. 사진 왼쪽 살짝 보이는 것은 오키나와 본섬 북부 구니가미이고 그 오른쪽으로 봉우리 7개가 연속하는 이헤야섬이 가물가물 보인다. 이 남성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바다일까, 섬일까, 아니면 그 자신일까.
세찬 파도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크지만 경쾌하다. 창밖으로 날개에 달린 프로펠러가 속도를 서서히 높이며 회전한다. 다른 쪽 창밖에서도 또 하나의 엔진이 으르렁댄다. 78인승 ATR-72 600 비행기.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2열 종대로 좌석이 놓여 있다. 승무원은 2명. 그곳에 가는 길의 시작이 사람들과 부대끼며 선반에 짐을 욱여넣느라 진부터 빠지는 중대형 여객기여서는 안 될 것만 같다. 이내 활주로를 박차기 위한 ‘풀 스로틀(엔진 최대 출력)’. 쌍발 터보프롭(프로펠러) 항공기는 일본 규슈 가고시마(鹿兒島)현 공항을 떠나 그 섬으로 간다. 요론섬(与論島)이다.
일본 가고시마공항에서 요론섬 요론공항을 하루 한 번씩 왕복 운항하는 JAC 소속 78인승 쌍발 터보프롭(프로펠러) ATR-72 600 비행기. 2027년 울릉도에 들어설 공항 활주로 길이 1200m와 같은 1200m 활주로가 있는 요론공항에 무리 없이 착륙했다. ● 작은 섬, 아찔한 바다
요론섬은 규슈에서 제일 남쪽에 있는 섬이다. 행정구역상 가고시마현에 속하지만 일본 최남단 오키나와(沖縄) 본섬에서 더 가깝다. 그곳 요론공항 활주로 길이는 1200m. 2027년 하반기 완공될 울릉도 신공항 활주로 거리와 같다. 국내 다른 공항 활주로보다는 짧지만, 터보프롭 쌍발기가 착륙하기에 큰 지장이 없다.
랜딩기어를 내린 비행기가 가볍게 텅 내려앉으며 빠르게 미끄러진다. 활주로 끝과 가까워지다 원심력이 약간 느껴질 정도로 반 바퀴를 돌아 터미널 앞 주기장(駐機場)으로 향한다. 주기장으로 빠지는 유도로가 없는 소규모 공항이어서 이런 방식을 쓴다.
공항 건물은 단층이다. 동행한 젊은 친구가 “국내 소도시 시외버스터미널 같다”고 속삭인다. 아닌 게 아니라 그렇다. 사람들 숨결이 더 가까이서 느껴진다. 짐을 찾아 밖으로 나와 공항 건물을 바라본다. 외벽 맨 위에 ‘与論空港’이라고 약 5m 간격으로 한 글자씩 파란색으로 적혀 있다. 씩 웃음이 나온다. 요론섬이 배경인 일본 영화 ‘메가네(안경)’(2007) 초반에 나온 그 건물 그대로다. 공항 앞 아스팔트 길도 색이 좀 바랬을 뿐 변한 것이 없다. 벌써 정겨워진다.
2007년 일본 영화 ‘메가네’에 나온 요론공항. 2025년 지금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요론섬은 작다. 섬 둘레가 23km 정도다. 일주(一周)도로 길이가 약 43km인 울릉도의 대략 절반 크기다. 차로 한 바퀴 돌면 넉넉하게 40분가량 걸린다. 차량 내비게이션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섬이다. 인구는 6000여 명. 초등학교 3곳, 중학교 2곳, 고등학교 1곳이 있다.
하지만 렌터카든 스쿠터든 자전거든 전동자전거든 전동킥보드든 빌려 타고 외곽일주도로를 달리다 어디든 멈춰 서서 바다를 향하면 탄성이 절로 난다. 수백만 년 전 산호초가 융기해 생겨난 섬. 사방팔방으로 짧게는 몇십 m, 멀게는 1km 넘게 산호초가 뻗어 있다. 그 위 에메랄드그린 빛 바다와 그 너머 남색 바다의 조우. 그것도 푸른 하늘 아래서. ‘위대한 풍경의 아름다움은 인간 힘으로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찬 것이다.’(‘섬’,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5)
산호초가 넓게 분포한 섬 동쪽 오가네쿠(大金久)해안의 오후. 에메랄드그린 빛 바다가 저 멀리서 남색 바다와 겹쳐진다. 하늘은 푸르다. 여섯 번의 아기자기한 ‘오르락내리락’을 거쳐 섬에서 가장 높은 해발 97m 언덕 하지피키파탄(舵引き丘)에 오르면 남쪽으로 오키나와 북부 구니가미(国頭)가, 서쪽으로 7개 봉우리가 이어진 이헤야(伊平屋)섬이, 북쪽으로 같은 아마미(奄美)군도에 속하는 오키노에라부(沖永良部)섬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방으로 탁 트인 수평선을 조금씩 가린 채 웅크린 섬들에서 묘한 긴장감과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섬에서 가장 높은 해발 97m 언덕 하지피키파탄(舵引き丘)에서 바라본 남쪽 바다. 낙조가 시작되고 있다. 왼쪽 저 멀리 7개 봉우리가 이어진 이헤야(伊平屋)섬이 보인다. 산호초가 넓게 분포한 섬 동쪽 오가네쿠(大金久)해안에서 간조 때 바다를 향해 1.5km쯤 배를 타고 나가면 눈부신 백사장이 드러난다. 유리가하마(百合ケ浜)다. 서핑보드를 타고 노를 저어 갈 수도 있다. 수위는 낮고 물살은 잔잔하다. 상대적으로 산호초가 짧게 뻗은 섬 서쪽 바다는 스쿠버다이빙 포인트들이 적지 않다. 섬은 공평하게 자연의 혜택을 나눠준다.
요론섬 동쪽 오가네쿠해안에서 간조 때 바다를 향해 1.5km쯤 배를 타고 나가면 드러나는 눈부신 백사장 유리가하마(百合ケ浜). 요론섬관광협회 유튜브 캡처 요론공항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완만한 만(灣)으로 둘러싸인 챠바나(茶花)해안이 있다. 자그마한 어항(漁港)을 끼고 있는 이 해안이 일몰 ‘맛집’이다. 바닷가에 아치 모양 문이 뚫린 그리스 키클라데스 양식의 하얀 구조물이 서 있다. 그 문을 통해 보이는 석양은 감동적이다. 키클라데스 건축 양식은 하얀 외벽과 군더더기 없는 모서리 곡선이 특징이다. 1984년 요론섬이 관광 부흥을 위해 이 양식으로 유명한 그리스 미코노스시(市)와 자매결연을 맺은 결과물의 하나다.
요론섬 서쪽 챠바나(茶花)해안에 서 있는 그리스 키클라데스 양식 하얀 구조물의 아치형 문으로 석양이 마지막 빛을 뿜어내고 있다. 챠바나해안 근처는 섬의 번화가다. 이곳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까지 30분 남짓 걸어간다. 우리 일행도 야생동물도 건물들도 ‘모두 짙은 밤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남은 것은 쏟아질 듯 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뿐이다.
● “나를 조용히 들여다보는 섬”
그러나 여행이 ‘관광지 도장 깨기’가 될 필요는 없다. 요론공항에서 지척인 숙소는 하니부(養母)해안을 면하고 있다. 역시 키클라데스 양식으로 지은 하얗고 간결한 빌라들 앞에 놓인 그네 의자에 앉아 시선을 먼바다로 향한다.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 버리게 된다’는 그르니에의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느껴진다.
키클라데스 양식으로 지은 하얗고 간결한 빌라 너머로 짙푸른 요론섬 서쪽 바다가 보인다. ‘메가네’는 ‘카모메 식당’(2006)을 만든 일본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荻上直子) 작품이다. 그는 낯선 곳에서 반복되는 단조로운 듯한 일상이, 그러나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상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주제로 영화를 즐겨 만든다. ‘메가네’도 마찬가지다.
도시에서 큰 여행용 가방을 끙끙대며 끌고 요론섬으로 ‘혼자’ 쉬러 온 주인공에게 민박집 주인이 말한다. ‘여기 있을 수 있는 재능이 있어 보인다’고. 그 재능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주인은 ‘타소가레(黃昏·황혼)’라고 답한다. 의미가 바로 머릿속에 들어오지는 않는데 한국어 자막은 ‘사색’이라고 번역했다. 그럼 타소가레는 어떻게 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거나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요론섬에서 바다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자니 타소가레가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나를 스스로 조용히 바라보는 것. 쓸데없는 집착과 불필요한 욕망을 잠시 내려놓는 것. 중요한 것은 조급해하지 않는다는 것. 사색보다는 관조에 가깝다. 그 작은, 그러나 지속되기 역시 어려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요론섬이기 때문일 터다.
우리 일행을 가이드해 준 60대 일본 여성은 4년 전 대도시 고베(神戸)에서 혼자 이주해 왔다고 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간결하게 답했다. “고요해서요.” 요론섬을 찾는 관광객 95%는 일본인이고 그중 대부분이 오키나와 사람들이다. 한국인이 즐겨 찾는 미야코(宮古)섬이나 이시가키(石桓)섬이 있는 오키나와 사람들이 왜? 숙소 주인이 말했다. “섬다운 섬에 가 보고 싶다네요.”
1990년대 중반 일본 최고 인기 TV 드라마 ‘롱베케이션’에서 남자 주인공 세나가 말했다. “있잖아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그런 때는 말이죠, 신이 준 휴가라고 생각하고 무리하지 않아요. 조급해하지 않아요. 억지로 애쓰지 않아요….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겨요.”
요론섬은 그런 휴가에 잘 어울리는 섬이다. 하지만 삶에서 휴가가 마냥 계속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메가네’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말한다. “여행은 문득 시작되지만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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