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마음을 흔드는 도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 주간동아
  • 입력 2025년 7월 12일 09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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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이의 여행블루스] 낭만과 고독, 따뜻함과 쓸쓸함… 도시 전체가 사색의 무대

12세기부터 군사적 요충지인 에든버러성. GETTYIMAGES
12세기부터 군사적 요충지인 에든버러성. GETTYIMAGES
북위 55도, 차가운 바닷바람이 성벽 너머를 스치는 스코틀랜드 수도 에든버러는 과거와 현재가 고요히 맞닿은 시간의 도시다. 성과 골목, 언덕과 바람부터 잔잔한 조명이 밤을 물들이는 풍경까지 낭만과 고독, 따뜻함과 쓸쓸함이 겹겹이 쌓여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에든버러로 가는 직항 노선은 없다. 그래서 암스테르담, 프랑크푸르트, 파리, 런던 등 유럽 거점 도시를 여행하다가 에든버러로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시 첫인상은 ‘고즈넉한 예스러움’이다. 골목마다 돌바닥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는 오래된 역사의 숨결을 닮았다. 고풍스러운 건물과 어두운 회색빛 지붕이 하나하나 나타나는 풍경은 마치 오래된 시집의 페이지를 넘기는 듯하다. 여행자에게 에든버러는 하나의 장면이 아니라, 한 권의 이야기책처럼 다가온다.

‘해리 포터’ 독자들의 성지 순례 장소
중세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올드타운(Old Town)’과 18세기 조지 왕조 시대 질서를 간직한 ‘뉴타운(New Town)’이 마치 2개 심장처럼 도시를 이룬다. 특히 언덕 위에 우뚝 선 에든버러성은 도시의 상징이다. 12세기부터 군사적 요충지이자 과거 왕가의 거처였던 이 성은 바람결을 따라 도시 전체를 굽어본다. ‘아서의 좌석’으로 불리는 오래된 화산 지형과 도시 전체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언덕 칼턴 힐, 그리고 성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로열 마일 길들은 여행자의 걸음을 자연스럽게 과거 시간 속으로 이끈다.

이곳에서 하루는 도시를 내려다보는 언덕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칼턴 힐에서 내려다보는 도시 풍경은 담백하면서도 장엄하다. 멀리 포스만의 바다가 은빛으로 빛나고, 도시 전체가 안개 속에서 서서히 피어오르듯 모습을 드러낸다. 저녁에는 아서의 좌석에 올라 해 질 녘 노을을 바라보자. 황금빛 햇살이 성을 감싸고, 도시가 마치 고요한 화폭처럼 펼쳐진다.

에든버러는 걸어서 여행하기 좋은 도시다. 걷다 보면 도시가 주는 사색의 결이 고스란히 여행자의 마음에 와 닿는다. 꼭 걸어야 할 길은 바로 로열 마일이다. 에든버러성에서 홀리루드하우스 궁전까지 이어지는 길은 스코틀랜드의 자존심이자, 도시의 중심축이다. 수많은 펍과 상점, 박물관, 역사적인 건물이 이 길을 따라 줄지어 서 있고, 낮에는 거리 공연이 이어지며, 밤에는 가스등 아래로 그림자들이 길게 드리운다. 바람이 늘 불고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낯빛을 띠지만 그 속에서 사람들은 웃고 마시며 노래한다.

세계 최대 공연 예술 축제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GETTYIMAGES
세계 최대 공연 예술 축제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GETTYIMAGES
모든 것이 슬로 장면으로 기억된다
에든버러의 매력은 그저 오래됐다는 데 있지 않다. 도시 전체가 살아 있는 문학관이자 사색의 무대다. 조앤 롤링이 ‘해리 포터’를 구상하던 커피숍 엘리펀트하우스는 이제 수많은 독자의 성지 순례 장소로 자리 잡았고, 고요한 골목길에서는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문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과 월터 스콧(1771~1832)의 흔적이 배어 있는 낡은 표지판들을 만날 수 있다. 도시 자체가 이미 하나의 시이며 소설이다.

매해 8월이면 이 조용한 도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무대로 변모한다. 세계 최대 공연 예술 축제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이 열리기 때문이다. 예술가 수천 명이 이 작은 도시에 모여 골목과 펍, 거리와 지하극장에서 무대를 펼친다. 연극, 댄스, 코미디, 마임, 거리극, 퍼포먼스 등 장르를 가리지 않으며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이 페스티벌은 1947년 기존 축제에 초청받지 못한 소수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공연을 올리면서 시작됐다. 낮에는 고성 아래에서 클래식 음악이 울려 퍼지며 밤에는 골목골목이 관객으로 가득 찬다. 에든버러의 고요한 회색빛은 잠시 물러나고,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예술극장이 된다.

스코틀랜드 전통 음식도 에든버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양 내장을 잘게 다져 향신료와 귀리를 섞어 만든 ‘해기스(Haggis)’는 도전해볼 만한 경험이고, 전통 펍에서 스카치위스키 한 잔과 함께하는 저녁은 완벽한 하루를 완성한다. 따뜻한 스콘과 클로티드 크림, 풍미가 강한 밀크티도 이 도시가 품은 여백을 잘 보여준다.

에든버러는 소란스럽게 즐기는 도시가 아니다. 느릿한 걸음과 깊은 호흡으로 시간을 음미하게 하는 곳이다. 유럽의 수많은 도시 중에서도 이곳만의 특별한 격조와 정서가 분명하다. 오래된 건물 사이를 스치는 스산한 바람과 회색빛 하늘, 고성의 실루엣. 그리고 그 사이를 걷는 나 자신. 이 모든 것이 슬로 장면으로 선명히 기억된다.

재이 여행작가는…
‌‌세계 100여 개국을 여행하며 세상을 향한 시선을 넓히기 시작했다. 지금은 삶의 대부분을 보낸 도시 생활을 마감하고 제주로 이주해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다양한 여행 콘텐츠를 생산하는 노마드 인생을 살고 있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97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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