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신경과 의사로 일한 저자
진단 전에 우연히 치매 발병 예측… 진행 속도 늦추기 위한 연구 나서
치매 치료제 임상시험 참여했다가… 부작용으로 뇌에 출혈 흔적 남기도
“내 경험이 다음 세대에 보탬 되길”
◇치매에 걸린 뇌과학자/대니얼 깁스, 터리사 H 바커 지음·정지인 옮김/320쪽·1만9500원·더퀘스트
30년 경력의 미국 신경과 의사이자 알츠하이머병 초기 환자인 대니얼 깁스 박사(오른쪽).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사는 그는 매일 아침 단골 카페를 방문한다. 저자는 “(몸에 문신을 한 카페 바리스타들처럼) 나의 뇌에도 문신이 있다. 바로 알츠하이머병과 싸운 흔적”이라고 했다. 사진 출처 대니얼 깁스 박사 홈페이지
저자가 후각을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처음 든 것은 2006년이었다. 아름다운 장미 옆을 지날 때였다. 몸을 숙여 코를 대봤지만 향기가 나지 않았다. 2012년 우연한 기회에 유전자 검사를 받았다가 APOE-4 유전자가 두 개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몇 년 안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릴 것이 확실시되는 결과였다.
신간은 치매에 걸린 70대 신경과 의사의 기록이다. 현재 알츠하이머병 초기 단계인 저자는, 30년 가까이 신경과 의사로 일하며 지켜본 알츠하이머 환자의 길을 자신이 걷고 있다. 이 질환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고 뇌 건강을 최대한 지킬 수 있는 시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과학자의 분투가 인상 깊다.
알츠하이머병은 인지 문제가 겉으로 드러나기 최대 20년 전부터 뇌에 변화를 일으킨다고 한다. 하지만 그간 알츠하이머병에 관한 연구는 말기와 최종 단계에 집중돼 왔다. 뇌의 변화가 시작된 잠복기를 알츠하이머병 정의에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래야 병의 진행을 늦추기 위한 개입을 더 빨리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알츠하이머병의 진행을 늦추기 위한 생활습관(유산소 운동, 매달 책 6∼10권을 읽는 정신 활동과 사회적 참여 등)을 자가 처방하는데, 이 같은 생활방식의 변화를 인지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고 짚는다. 유전 등의 이유로 발병 위험성이 높은 경우라면 40대부터 시작하는 게 효과적이다. 조기 진단과 치료를 통해 몇 년, 심지어 몇십 년의 의미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한번은 아두카누맙이라는 치료제를 주입하는 임상시험에 참여했다가 뇌에 미세출혈이 일어나 철분 색소가 문신처럼 남기도 했다. 저자가 여러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임상시험에 계속 참여하는 것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의 치료법을 만드는 데 일조하기 위해서다. “어떤 연구를 통해 내 수명을 연장하거나 알츠하이머병의 진행을 늦출 가능성이 매우 작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내 바람은 이렇게 연구에 참여함으로써 다음 세대에게, 내 자식들의 세대에게 보탬이 되는 것, 그리하여 나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생애에는 알츠하이머병을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고백이 울림을 준다.
원제는 ‘내 뇌에 새긴 문신(A Tattoo on My Brain)’이다. 뇌에 남은 부작용의 흔적을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두려움과 편견에 맞서는 저항의 상징으로 삼는다는 의미다. 저자는 2021년 2월부터 블로그를 운영하며 알츠하이머 연구에 중요한 진전이 있을 때마다 최신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질병의 운명을 이해하고 있는 신경과 전문의로서 자신이 겪은 질환의 증상을 증언하기도 한다.
알츠하이머병의 끝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의 기록을 읽을 기회는 별로 없다. 저자 역시 자고 일어났더니 철자를 하나하나 짚어보지 않고서는 단순한 단어조차 읽을 수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마냥 상실감에 젖지 않고 “허비할 시간이 없다”며 다시금 자신을 재촉한다.
저자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알츠하이머병을 더 일찍 진단하고 치료함으로써 시간을 버는 것이 중요하다고 되풀이해 강조한다. 그리고 회피할 수 없는 상실 속에서도 사랑과 행복, 성취를 위한 노력이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삶은 언제나 참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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