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日도 서양함대 두려웠지만 조선과 달리 개방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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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 박훈 교수, 역사교훈 다룬 책 출간
약소국일수록 배외주의자 득세
리스크 있어도 교류해야 번영… 日 유연한 리더, 반대파도 등용
무조건적 배일주의 적절히 제어… 일본 이끌어야할 분야 적지 않아

일본 근대를 통해 오늘날의 한국을 성찰한 신간을 낸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본 근대를 통해 오늘날의 한국을 성찰한 신간을 낸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광복 80주년을 맞는 오늘날 한국은 세계 주요 국가로 발돋움했다. 한반도를 강점했던 일본은 우리와 나란히 선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됐다. 역사에서 되새겨야 할 교훈이 80년 전과 같은 배일(排日)에 머물러선 안 되지 않을까. 마침 국내 대표적 일본 근대사 학자인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가 최근 ‘한국인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의 역사’(어크로스)를 발간했다. 지난달 23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빌헬름 하이네의 그림 ‘매슈 페리 제독의 가나가와 방문’. 1854년 지금의 일본 요코하마에서 이뤄진 미일화친조약 체결 장면을 담고 있다. 함대를 이끌고 나타난 미국 페리 제독의 압력에 체결된 이 조약으로 일본은 나가사키 외에 시모다, 하코다테 두 항구에 외국의 선박이 기항하는 것을 허용했다. 어크로스 제공
신간은 메이지유신부터 패전까지 근대 일본의 도약과 몰락의 역사를 우리의 관점에서 짚어 본 책이다. 19세기 일본은 인구와 경제 대국으로 에도 막부가 안정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 일본은 체제를 변혁하며 근대화의 길을 걸었는데, 농민 반란이 잇따르던 조선은 불안한 체제를 고수하다가 몰락했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박 교수는 “서양 함대를 본 일본도 외세를 두려워했던 건 매한가지였지만, 개방을 하고 적극적으로 외부의 충격을 받아들였다”며 “반면 조선은 개방을 너무 늦게 한 데다, 개혁의 길로 나아가려는 정치적 용단이 부족했다”고 진단했다. 일본은 서구 열강의 외압에 끌려간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국가의 전환점으로 삼아 능동적으로 도약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 日 유신지사들의 방향 전환

1863년 10월 사쓰마번에 밀려 교토에서 쫓겨난 조슈번은 ‘양이를 주장하다가 탄압을 받았다’는 명분을 쥔다. 박 교수는 책에서 이를 두고 “약소국일수록…외세를 받아들이고 이용해 도약할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의 폭이 좁다. 그러니 곧잘 배외주의자가 그 사회의 지도자가 된다. 그러나…그들은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썼다.

“사실 개방은 인기가 없거든요. 충격이 있고, 관성을 바꿔야 하고, 손해 보는 집단이 생기고, 백성은 불안하니 동요하지요. 하지만 고립돼서 잘되는 사회는 거의 없습니다. 20세기 후반 한국처럼 리스크가 있어도 개방해 외부와 연결하고 교류해야 발전과 번영이 옵니다. 극단적 외세 배격의 끝엔 ‘주체 조선’, 북한이 있지요.”

물론 교류엔 지켜야 할 선이 있다. 박 교수는 “조선은 외세를 제한 없이 끌어들이다가 청나라군을 불러 국내의 난을 진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일본은 내전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양측 모두 ‘외국의 군대를 동원하진 않는다’는 컨센서스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특히 지사(志士)들의 유연성이 눈에 띈다. 메이지유신의 상징적 인물 가운데 하나인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가 대표적이다. 미국 페리 제독이 함선을 이끌고 나타났던 1854년에 그는 에도에 있었다. 젊은 혈기로 ‘서양 오랑캐의 목을 따겠다’던 그는 ‘정신 승리’로 서양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난학자 아래로 들어가 서양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해군과 무역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투신했다. 유신의 양대 세력인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화해시키고 ‘삿초동맹’을 맺도록 중재하기도 했다.

박 교수는 “사카모토에게선 ‘아니다’ 싶으면 바로 방향을 전환하는 ‘풋워크의 경쾌함’을 볼 수 있다”며 “평화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인 사카모토가 살아서 메이지 정부에서 활약했다면 일본의 근대는 훨씬 명랑했을 것”이라고 했다.

반면 우리 근대사에서 사카모토처럼 유연한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박 교수는 “변하지 않는 것을 찾는 성리학이 사회를 지배한 것도 한 원인”이라며 “명분론에 휩쓸리고 타협과 협상을 허락하지 않는 사고방식은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주는 것 같다”고 했다.

막부군의 ‘질서 있는 퇴각’도 눈에 띈다. 막부군의 마지막 패전 당시 총대장은 원래 막부의 해체와 왕정복고를 주장했다가 한직으로 내쳐졌던 가쓰 가이슈(勝海舟·1823∼1899)였다. 패전을 예감한 막부 측이 사쓰마번의 리더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1828∼1877)와 친교가 있던 그를 대장으로 내세운 것. 두 사람의 협상을 통해 에도 주민의 큰 피해 없이 막부는 물러날 수 있었다. 원한과 분열은 최소화됐다. 박 교수는 당시 역사에서 “진영 대립의 완화와 진영을 초월하는 인재 등용이 보인다”고 했다.

“메이지 정부가 막부의 가신들을 많이 등용합니다. 막부 해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1836∼1908)가 대표적인 인물이에요. 최후까지 정부군에 항전했던 인물인데, 3년 콩밥 먹이고 외무장관까지 시키거든요. 모든 걸 ‘그저 승부일 뿐’이라고 보는 사무라이들의 장점이지요.”

● ‘급류’로 바뀌는 역사의 시간

하지만 일본의 도약은 침략으로 이어졌다. 일본에선 동아시아 정세에 별 변동이 없던 19세기 초, 세계를 인식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세계를 정복해야 한다는 ‘웅비론’이 등장했다. 박 교수는 “외세의 침략을 당한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고 했다. “위기감이 한편에선 ‘완전히 쇄국하자’는 쪽으로, 다른 쪽에선 거꾸로 ‘세계를 정복하자’는 뒤틀린 반동으로 나타난 듯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이 국방력을 유지하고, 중국이 지금과 같은 규모로 존재하는 한 일본이 한반도에서 모험주의적 선택을 할 소지는 거의 없다는 것이 박 교수의 시각이다. 그는 특히 우리를 둘러싼 지정학적 상황에선 한일의 협조가 긴요하다고 강조했다.

“유럽의 영국과 프랑스처럼 한일 양국이 유라시아 대륙 동단에서 강력하게 협조하는 게 일본으로서도, 한국으로서도 유일한 살길입니다. 그러면서 중국이 따라오는 걸 기다리는 방법뿐이에요. 그러기 위해선 일본의 극우파를 고립시켜야 하고, 국내 일각의 무조건적 배일주의도 적절히 제어돼야겠지요. 이젠 성숙한 대일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가 일본을 이끌어야 할 분야가 적지 않습니다.”

#박훈 교수#광복 80주년#근대 일본#일본 근대화#조선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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