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세토 내해 오기지마·메기지마 섬
세토우치 예술제 힐링 여행지로 입소문
페리로 섬과 섬 오가며 작품 감상-트래킹
여행에 진심이어도 버킷 여행지 발굴은 쉽지 않다. 8할이 훌륭해도 2할이 부족하면 자격이 있으려나 싶다. 지난 6월 일본에선 예기치 않게 보물 같은 여행지를 ‘건졌다’. 일본 여행이라곤 도쿄 오사카 삿포로 같은 도시 경험이 전부. 유행하는 일본 소도시 여행을 건너뛰고 떠난 ‘예술 섬 여행’이 단숨에 인생 여행 목록에 올랐다. 일본에서 네 번째로 큰 시코쿠 섬 가가와현 세토 내해의 오기지마(男木島)와 메기지마(女木島) 얘기다.
>> 자연에 예술 더하니 섬 매력 UP
세토 내해는 일본의 지중해라 불린다. 크고 작은 섬 약 3000개를 품은 데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2010년부터 이곳에선 3년마다 ‘세토우치 예술제’가 열리고 있다. 섬과 인근 연안 17곳에서 100여 일간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섬 여행과 예술 작품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매력에 이 예술제는 국제적인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예술제 기간엔 페리를 타고 섬과 섬을 오가는 국내외 관광객들로 온 섬이 들썩인다. 총 누적 관람객은 약 370만 명. 여섯 번째를 맞은 올해 예술제는 5, 8, 11월에 열린다.
예술제 무대로 가장 잘 알려진 섬은 나오시마(直島)와 데시마(豊島)다. 예술제의 씨앗을 처음 틔운 나오시마는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으로 세계적 관광지가 됐다. 데시마 역시 2010년 단 하나의 작품(나이토 레이(内藤礼)의 ‘모형(母型)’)만 전시하는 데시마미술관으로 이름을 알렸다.
오기지마와 메기지마는 유명세가 덜하다. 나오시마·데시마에 비해 섬 크기가 작고 자체 미술관도 없다. 자연히 정해진 기간 안에 예술제를 둘러보는 경우 후 순위로 밀리곤 한다. 하지만 최근엔 입소문을 타고 두 섬을 찾는 여행객들이 늘고 있다.
두 섬으로 향하는 페리는 다카마쓰(高松) 항에서 출발한다. 다카마쓰는 가가와현의 현청이 있는 세토 내해의 중심 도시다. 예술제의 도시여서일까. 거리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항 근처로 가니 상설 전시물도 눈에 띈다. 도시의 랜드마크 ‘Liminal Air-core’, 지붕의 곡선이 인상적인 ‘가가와 현립 아리나’ 등이다. 페리 외관마저 하나의 작품 같다. 붉은 색동옷을 입은 듯하다.
오기지마의 혼예술제 기간이 아니지만 페리는 거의 꽉 찼다. 국내 여행객들 사이로 외국인 관광객이 더러 섞여 있다. 페리를 타고 달리길 40분, 저 멀리 오기지마가 보인다. 연청색, 연회색, 연갈색, 연녹색…. 빛바랜 옛 가옥 지붕들이 섬의 능선을 따라 정갈하게 엎드려 있다. 우아한 마을을 배경으로 눈에 익은 건물이 방문객들을 맞는다. 상설 전시작인 ‘오기지마의 혼’이다.
다코쓰보루오기지마의 혼을 한 바퀴 돌아본다. 가까이서 보니 조개 모양의 하얀 지붕에 각국의 언어가 새겨져 있다. 알아도 좋고 몰라도 문제없다는 다독임일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 분별 가능한 언어, 그리고 낯선 언어들이 뒤섞인 모양이 묘한 위안을 준다. 몇 발자국 더 걸음 하니 커다란 항아리가 보인다. 작품명은 ‘다코쓰보루’. 섬 전통인 문어잡이 항아리를 형상화했다. 섬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백하게 표현해 장난스럽지만 가볍지 않다. 밤바다에 돌멩이를 엇비슷하게 던지면 물결이 반짝이던 추억, 방파제 넘어 밀려오던 갯강구 떼에 기겁하던 기억…. 바다에 얽힌 이야기들이 하나둘 달려 나온다.
걷는 방주노아의 방주에서 착상을 얻은 ‘걷는 방주’를 지나 언덕 지형의 섬마을로 향한다. 좁다란 골목 양옆에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오솔길을 오르다 보니 고양이가 자꾸 눈에 띈다. 고양이 벽화, 고양이 모형, 고양이 인형…. 어느 순간 섬마을 고양이들이 와서 다리에 얼굴을 비빈다. 고양이가 많은 ‘고양이 섬’ 출신답게 낯가림이 전혀 없다. 이 섬에선 ‘작품’만 작품인 건 아니다. 아기자기한 민박집, 들꽃, 벽화, 고양이 소품을 허겁지겁 눈에 집어 담다 보니 어느새 정상이다. 벽화 옆 낡은 벤치. 굽은 등의 어르신이 한참을 미동 없이 앉아 있다. 그의 눈길 끝을 따라가니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가 있다. 그 풍경이 넋을 빼가니 잡념이 걷힌다.
>> 버려진 섬에서 세계적 예술 무대로
갈매기 주차장오기지마와 페리로 20분 거리에 있는 메기지마는 도깨비 관련 설화를 품은 섬이다. 입구부터 도깨비 조각물이 관람객들을 반긴다. 약 200마리의 갈매기 떼도 환영을 거든다. 바람의 흐름에 따라 방향을 바꾸는 작품 ‘갈매기 주차장’이다. 조금 걸어가니 돛을 단 그랜드 피아노가 보인다.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파도 소리와 호응하는 작품 ‘20세기의 회상’이다.
도깨비 기와 프로젝트2메기지마엔 관광 명소가 있다. 100여 년 전 발견된 오니가시마 대동굴, 일명 도깨비 동굴이다. 동굴까지 도보로 가도 되고 버스를 탈 수도 있다. 날씨가 30도를 웃돌아 버스를 타기로 한다. 서늘한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도깨비 전설의 주인공인 모모타로와 도깨비 조형물들이 방문객들을 반긴다. 곳곳에는 가가와현 중학생 3000명이 만든 도깨비 기와가 널려 있다. ‘도깨비 기와 프로젝트2’다.
예술제는 두 섬을 비롯한 일대 섬들의 가치를 끌어올렸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 일대 섬들은 폐허에 가까웠다. 불법 투기한 산업 폐기물과 정련소에서 배출한 유해물질로 몸살을 앓았다. 변화는 한 출판기업의 메세나사업으로 시작됐다. 후쿠타케 소이치로(福武總一郎) 베네세 홀딩스 명예고문이 1990년 버려진 섬에 예술을 심기 시작, 2010년 세토우치 국제예술제를 선보였다.
방치된 섬을 되살린 전략은 ‘있는 것에 가치를 더하다’였다. 자연에 작품을 더해 매력을 높이고, 빈집을 개조해 전시장이나 레스토랑으로 활용했다. 화룡점정은 사람이다. 고령자가 대부분인 지역 주민이 예술제 주축이다. 행사를 기획하고 전시 해설을 하고 봉사를 도맡는다. 그 결과 섬도, 섬 주민도 활력을 되찾았다. 히치하라 토키코 세토우치 국제 예술제 담당은 “아티스트와 지역 주민, 봉사자들이 함께 모여 예술제를 준비하는 1000일이란 기간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며 “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미소라는 작품도 꼭 느껴봤으면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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