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완벽한 타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 개의 삶을 산다. 공적인 삶, 개인의 삶, 비밀의 삶.’ 여기에 또 하나의 삶을 더해봅니다. 당근의 삶!.
영화에서 오랜만에 부부 동반으로 만난 친구들이 위험한 게임을 시작합니다. 휴대폰을 식탁 위에 올려 놓고 그날 밤 오는 통화와 메시지, 이메일을 모두 ‘까자’는 것이죠. 그들은 이것이 모든 인간관계를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하는 멸망 시나리오 ‘둠스데이’가 될 것임을 예상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휴대전화 속에서 가족은 물론 나 자신도 완벽한 타인이라는 것을, ‘그날’이 되어서야 깨닫거든요.
그날은 지난해 봄 금요일, 명품 브랜드에서 받은 사은품을 중고거래에 올린 지 사흘째되던 날이었어요. ‘안녕하세요. 직거래 원합니다. 오후에 광화문에 들를 일이 있는데 몇 시에 가능하실까요.’ 중고거래 앱의 알림이 떴습니다. 인사성 좋고, 번잡한 질문과 에누리 요청 없이 구매결정을 한데다, 내가 있는 곳까지 와주신다니!
꽤 오래 중고거래를 하는 동안 나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거래물품 맞춤형 인간이 되었더군요. 고양이용품이나 식물을 직거래할 땐 생명을 윤리적으로 보호하는 국제 단체, 예를 들면 PETA의 예비 회원쯤이 되어 슬로건 티셔츠에 열대우림보호 캠페인에 동참하는 3세계 브랜드의 운동화를 신습니다. 가구를 거래할 때는 안목과 트렌드 정보를 갖춘 사람답게 깔끔하고 미니멀한 인상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기의 목적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거래 상대의 기대에 맞춰진 나를 발견하곤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명품을 거래할 땐 명품을 소비하는 내가 직거래 장소에 나가야죠. 명품 로고로 휘감기보단, 럭셔리 부티크의 선임 매니저 정도로 보이는 게 딱 좋아요. 중고 명품 거래에서는 신뢰가 중요하거든요.
그날의 쿨거래자는 오토바이를 타고 왔습니다. 봄바람 속에 헬멧을 들고 나를 기다린 그는 강아지상의 미남이었습니다. 그는 누나에게 선물할 아이템을 굉장히 싸게 얻은 데 대해 여러 번 감사하면서 별다방의 커피를 사겠다고 말했는데, 이는 물건값에 비해 과한 호의라 거절을 했습니다. 그날 밤, 강아지남은 ‘챗(대화창)’으로 주말에 낚시를 가서 물고기를 잡으면 회를 쳐서 주겠다는, 중고거래 대화에서 처음 들어본, 부조리 연극의 대사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고맙지만 사양한다는 주장을 관철하는 동안 취미와 활어회와 고마운 이웃에 대한 대화가 몇 차례 오갔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정말로 숭어를 잡았다며 가져다주겠다는 챗을 또 다시 보내왔습니다. 갑자기 나는 횟칼을 든 강아지남이 두려워졌습니다.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의 호의는 도다리에서 민어의 계절까지 이어졌습니다.
문득 이 강아지남이 다시 떠오른 것은 TV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변호사들이 나와 ‘불륜의 성지’로 중고거래 플랫폼을 꼽았을 때였어요. 동네를 기반으로 한 중고거래가 가까운 곳에서 상대를 찾거나 거래를 핑계 삼아 데이트 하기에 좋다는 이야기, 중고거래의 챗은 배우자 압수수색 리스트에서 빠져 있어 플랫폼으로 애용된다는 고발이야 새삼스럽지 않았어요. 하지만 중고거래물품들을 보며 체형, 나이, 경제력, 스타일 등을 파악해 상대를 고른다는 변호사의 말을 듣자, 그동안 거래 과정에서 맥락 없이 떠돌던 단어들이 소름처럼 오소소 돋더군요. ‘누님’, ‘커피’, 그리고 ‘물고기’. 공교롭게도 여성용 물품을 거래한 그들은 모두 ‘누님’이나 ‘여동생’ 거래를 대신한다고 했어요. 그들의 거래물품은 명품이 아니라, 사람이었던 걸까요?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기대한 직거래에서 운도 없이 ‘눈치없는 고모’를 만난 걸까요. 이건 표본이 너무 적은 통계의 오류이거나 망령이 만든 한여름 밤의 꿈일지도 모르지만.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는 가족과 친구, 회사 동료들과 이어져 있으니 때론 ‘생기부’처럼 관리도 해야합니다. 반면 나의 중고거래 아이디는 숨긴 적도 없지만 지인들에게 공개된 적이 없고 가족들조차 무관심합니다. 중고거래 유니버스에서 거래물품 개수만큼의 ‘내’가 가장 ‘완벽한 타인’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 셈이죠. 그러니 거래물품을 보여달라든가 중고거래 계정을 알려달라는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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