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강가에서 낚시하는 여인의 정체…독립운동가 김마리아[청계천 옆 사진관]

  • 동아일보

코멘트

백년사진. No. 127

● 미국에서 낚싯대를 메고 걷는 여인의 수상한 사진

흰색 투피스를 입고 낚싯대를 든 채 강가를 걷는 단말 머리 여성의 사진이 있습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평범하지만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이 사진의 내용을 보니 평범하진 않습니다. 통상적인 인터뷰 사진이 아니라 생활 속 한 장면을 자연스럽게 포착한 스냅사진입니다. 그런데 누가 찍었는지에 대한 표기가 없습니다. 본인이 신문사에 제보를 한 것인지, 기자가 찍은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사진 속 주인공은 3.1운동과 애국부인회 활동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였습니다. 1925년 여름, 동아일보 지면에 이례적으로 3회 연속 르포가 실렸습니다. 8월 15일자, 16일자, 17일자 신문입니다. 제목은 ‘金瑪琍亞孃 朝鮮脫走顚末(김마리아 양 조선탈주전말)’. 이번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르포 기사 마지막 날인 1925년 8월 17일자 신문에 실린 사진입니다.

◇사진은 미주에서 고기잡이하는 김마리아양. 1925년 8월  17일자 동아일보.
◇사진은 미주에서 고기잡이하는 김마리아양. 1925년 8월 17일자 동아일보.


이 기사의 시작은 독자의 편지에서 시작했습니다. 신문사로 독자가 궁금한 점을 편지로 알리고, 그에 대해 신문사가 답하는 기사 형식입니다. “몇 년 전 3.1 운동 이후로 애국부인단(愛國婦人會)사건으로 고초를 당했던 김마리아(金瑪琍亞)양이 피신 한 후 4,5년 동안 관련 소식이 없는데, 독자 기자 코너를 통해 기자께서 알아봐 줄 수는 없습니까?” 서울 시내 숭인동에 살고 있다는 한 여학생이 신문사로 보낸 편지입니다.

독자의 질문에 신문사가 직접 미국에 가서 김마리아양을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었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그냥 “최근 미국에서 김양을 만나고 귀국한 모(某)씨에 따르면”이라는 표현으로 그녀의 근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독립운동을 했던 젊은 여성의 삶을 간결하지만 비교적 긴 분량으로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도 불분명하고 기획 의도도 익명의 독자 편지에서 시작했다는 점에서 지금의 저널리즘 원칙에 비춰보면 엉터리에 가까운 기사입니다. 1920년대 신문에서 가끔 ‘무명회(無名會)’라는 일종의 공동취재단 명의의 기사가 볼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 관련 또는 일제의 만행을 보도하면서 개인 실명 대신에 사용되었습니다. 독자 제보도 ‘무명씨(無名氏)’라는 방식으로 지면에 게재된 경우도 자주 있었습니다.

검열과 문책이 일상적인 언론 환경에서 익명(匿名) 속에 숨을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독자와 기자들의 입장을 생각해보니 이 사진 역시 ‘가장 합리적인’ 보도 방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출처가 불분명하지만 낚싯대를 들러 맨 김마리아 선생의 사진과 함께 3회에 걸쳐 게재된 기사를 읽으면서, 그녀의 길고 고단했던 여정이 활자에 묻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활자를 통해 남아 있는 그녀의 삶을 복원해 보았습니다.

● 감옥과 병상에서 탈출을 꿈꾸다

김마리아는 15년 전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를 졸업하고 3년여간 교사 생활을 한 후 일본 유학을 통해 신여성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근대적 여성’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토대로 민족과 여성의 운명을 함께 고민하며, 시대가 부여한 사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졸업을 앞둔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그는 학생과 여성들을 규합해 시위에 앞장섰습니다. 곧바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같은 해 12월 애국부인단(愛國婦人團) 사건으로 대구 형무소로 다시 수감됩니다. 별의 별 고초를 겪은 후 온갖 병을 얻은 채 1920년 4월 29일에 보석으로 석방됩니다.

감옥은 젊은 여인의 몸을 빠르게 갉아먹었습니다. ‘비상악골충’이라는 무서운 병이 찾아왔고, 얼굴 뼈를 깎아내는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수술대에 오른 여인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조국의 독립을 꿈꾸던 마음은 병든 육신에 갇혔지만, 꺾이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성북동 은신처에서 요양하며 그는 결심했습니다. “반드시 자유를 찾아 떠날 것이다.”

● 바다를 건너는 길, 목숨을 건 여정

1920년, 그는 이름을 김근포(金槿圃)로 바꾸고 얼굴을 가린 채 서울을 빠져나왔습니다. 인력거와 자동차를 갈아타며 인천에 도착했고, 동지들과 함께 작은 밀항선에 올랐습니다. 병든 몸은 바다의 흔들림을 이기지 못했고, 배 위에서 몇 차례나 쓰러졌습니다. 미리 준비하여 가지고 간 『모펜』 주사를 여러 번 맞았습니다. 함께 배를 탄 동지들이 그녀의 손을 잡았습니다. 기도와 간호가 이어졌고, 김마리아는 다시 일어났습니다. 멀리 고향 송화의 산줄기가 눈앞에 아른거리자, 그는 배 위에서 ‘망향가’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다는 매섭게 요동쳤지만, 마음은 이미 더 넓은 바다로 향해 있었습니다. 기자는 당시 같은 배를 타고 있던 사람의 전언을 통해, 당시 그녀가 망망대해에서 고향을 보며 불렀던 노래의 내용을 알지만, 그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할 자유도 없다고 탄식합니다.

20여 일의 고된 항해 끝에 도착한 곳은 산둥반도 웨이하이. 하지만 상하이로 가는 길조차 그녀에게는 또 다른 싸움이었습니다. 병세 때문에 잠시 현지에 머물며 회복해야 했고, 뒤늦게야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 상하이, 그리고 미주로


상하이에서 그는 다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애국부인회 간부로, 임시의정원 대의원으로 선출되며 여성 지도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러나 김마리아는 정치만으로는 독립이 완성되지 않음을 일찍 깨달았습니다.

“교육이 있어야 민족이 선다.”

그녀는 태평양 건너 미국으로 향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병든 몸과 뜨거운 의지뿐이었지만 말입니다.

● 미국 유학, 노동으로 마련한 학비

김양이 태평양(太平洋)의 험한 물결을 헤치고 22일 만에 미국에 도착한 것은 1923년 7월 11일이었습니다. 미주 땅에 닿은 김마리아는 곧장 노동으로 학비를 마련했습니다. 공장에서 일을 하는 한편 틈 있는 대로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처사(處士)의 생활도 하였습니다. 병세가 도져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지만, 공부를 향한 열망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미소라주 팍빌』에 있는 『팍』 대학 문과에 입학한 것은 1924년 9월이었다는데 본래 총명하고 아담한 그는 반공(半工)생으로 생활하면서도 학과 성적이 좋아서 일반 학생들의 경애를 받았으며 교장 이하 여러 선생들의 사랑도 남달리 받았습니다. 당시 김양을 만나보고 귀국한 모씨의 말을 들으면 양은 2년 후 그 대학을 졸업하고 또 후과(后科)를 일년 더하여 상당한 학위를 얻은 후 교육계에 종신할 결심을 하고 공부에만 열중인데 어떤 좋은 기회가 오면 교육계에 몸담아 민족의 미래를 밝히겠다는 꿈을 키웠습니다. 독립운동의 다른 이름은, 그에게 ‘배움’이었습니다.

● 신문 보도 이후의 삶

김마리아는 오랜 망명 생활을 정리하고 1933년 귀국했지만 원산에만 머무른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는 해방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젊은 시절의 꿈에 비해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감옥의 어둠 속에서도,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병상의 고통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그녀의 마음. 그것은 단순히 한 여성의 고난이 아니라, 시대를 건너 독립을 향한 민족의 숨결이었습니다. 낚싯대를 멘 채 휴일을 보내는 듯한 스냅 사진 속에는 이런 스토리가 숨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시나요? 좋은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

#청계천 옆 사진관#백년사진#독립운동가 김마리아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