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항아리와 김환기 어우러진 ‘흙의 노래’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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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고재 ‘흙으로부터’ 전시회 열려
도자기-회화 등 흙 소재 작품 모아

학고재에서 열리는 ‘흙으로부터’ 전시. 왼쪽부터 이진용의 ‘컨티뉴엄’ 연작, 조선 시대 도자기 ‘흑자 편호’, 김환기의 ‘항아리’. 뉴시스
학고재에서 열리는 ‘흙으로부터’ 전시. 왼쪽부터 이진용의 ‘컨티뉴엄’ 연작, 조선 시대 도자기 ‘흑자 편호’, 김환기의 ‘항아리’. 뉴시스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때에도/그대(술병)가 상에 놓이지 않으면/어떻게 손님을 즐겁게 하랴!(花月令辰/非爾在牀/曷以娛賓) … 쓰기에는 아름답지만/모든 허물이 여기서 비롯된다(用之斯美/百咎攸自).’

표주박처럼 둥근 몸에 가늘고 긴 입을 가진 백자 위에 푸른색 글씨로 한시가 적혀 있다. 손님을 대접하는 상에 올랐을 이 백자는 술의 정취를 노래하면서도, 절제하지 않으면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옛 시절의 낭만이 가득한 이 술병부터 기울어진 달항아리, 깊은 검은색의 흑자(黑瓷)와 분청사기까지 조선 시대 도자기와 한국 현대미술 작품을 함께 선보이는 기획전 ‘흙으로부터’가 20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에서 개막했다.

전시는 분청사기와 박영하의 회화 작품 ‘내일의 너’로 시작한다. 분청사기의 투박한 질감과 회화 작품 속 거친 천연 안료가 교차하는 가운데, 달항아리 도자기 옆에는 한국 어디에서나 보이던 항아리를 그린 송현숙의 연작이 전시됐다. 송현숙은 1970년대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건너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말뚝, 항아리, 명주실 등의 사물로 표현하고 있다.

김환기가 백자를 그린 회화 ‘항아리’ 앞에는 칠흑처럼 까만 ‘흑자 편호’가 자리한다. 흑자는 철분이 다량 함유된 유약을 칠해 만든 것으로, 고려 초기 등장해 조선 말까지 제작됐다.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흑자는 15∼16세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전시장 맞은편에는 백자 술병인 ‘표형문자입주병’이 전시됐다. 이 병 좌우로 김환기가 한글을 연상케 하는 문자를 그린 추상 ‘무제’(1960년대)와 작은 활자들을 모아서 제작한 이진용 작가의 ‘컨티뉴엄’ 연작이 벽면을 가득 채운다. 이렇게 전시는 흙으로 빚은 도자기에서 시작해 흙을 재료로 하거나 이것을 연상케 하는 회화, 설치 작품으로 확장된다.

학고재 신관에서는 박광수, 로와정, 지근욱 등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이어진다. 박광수 작가는 ‘땅과 화살’을 비롯해 ‘땅의 표면에 닿는 느낌’에서 영감을 얻은 회화 연작을, 로와정은 못을 이용한 개념 설치 작품 ‘N’을 선보인다. 지근욱 작가는 우주의 형상을 상상하며 색연필로 규칙적인 선을 긋거나 프린트로 미세한 망점을 새겨 만든 회화 연작 ‘스페이스 엔진’을 공개했다.

신리사 학고재 기획팀장은 “흙을 따라 전통과 현대, 물질과 정신, 기억과 감각 사이 연속성을 하나의 장에 펼쳐보고자 했다”며 “흙이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니듯 한국성 역시 시대와 맥락 속에서 유연하게 변주되는 개념임을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통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 달 13일까지.

#조선도자기#백자#분청사기#흑자#한국현대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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