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들판, 그 길… 번뇌에 쉼표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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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티아고 당진 ‘버그내 순례길’
김대건 신부 탄생한 솔뫼성지부터… 합덕성당∼신리성지 이르는 13.2㎞
내륙 깊이 바닷물 들어와 포구 이뤄… 서양 선교사들 활동한 천주교 순례길
종교 떠나 자신 삶 돌아보는 걸음이길

온전히 자신의 걸음에 의지해 그저 묵묵히 걷는 순례길. 종교가 없어도 상관없다. 고즈넉하게 펼쳐진 들판 사이를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동안, 온갖 번뇌로 들끓던 마음이 어느새 부드럽게 가라앉는 걸 느낄 수 있으니.

22일 ‘한국의 산티아고’라 불리는 충남 당진 ‘버그내 순례길’을 걸었다. 버그내 순례길은 당진 솔뫼성지부터 합덕성당, 신리성지를 잇는 약 13.2km의 천주교 순례길. 버그내는 합덕 장터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까지 들어와 포구를 이뤘기 때문에 서양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와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박해를 피해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던 선교사와 신자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순례자의 길이 형성됐다.

솔뫼성지 내 성 김대건 신부 생가 앞에 세워진 고 프란치스코 교황 동상. 동아일보 DB
솔뫼성지 내 성 김대건 신부 생가 앞에 세워진 고 프란치스코 교황 동상. 동아일보 DB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란 뜻의 솔뫼성지는 1821년 8월 21일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21∼1846)가 탄생한 곳이다. 이곳에 터를 잡은 김대건 신부 집안은 증조부 김진후, 작은할아버지 김종한, 부친 김제준, 당고모 김데레사, 김대건 신부 등 4대에 걸쳐 10명이 넘는 순교자를 배출했다.

2014년 8월 15일 방한한 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솔뫼성지 내 성 김대건 신부 생가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당시 대전교구 장인 유흥식 추기경. 동아일보 DB
2014년 8월 15일 방한한 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솔뫼성지 내 성 김대건 신부 생가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당시 대전교구 장인 유흥식 추기경. 동아일보 DB
이 때문에 솔뫼성지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례지가 됐다. 2014년 8월 방한한 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을 방문해 김대건 신부 생가 앞에서 기도를 드렸는데, 이 모습을 그대로 형상화한 동상이 생가 앞에 세워져 있다.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한 당진 합덕성당. 당진=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한 당진 합덕성당. 당진=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1890년 예산 양촌성당으로 출발한 합덕성당은 충남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중 하나다. 1899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합덕성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1929년 페랭 신부가 벽돌로 장엄한 고딕풍의 성당으로 신축해 지금의 모습이 됐다.

‘헉헉’거리며 성당 앞 계단을 오르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빛의 광채가 온통 눈을 감쌌다. 작열하는 태양이 정확하게 성당 뒤에 숨어 마치 광배(光背)와 같은 효과를 냈다. 이런 점까지 고려하고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 힘든 삶을 살았던 이들에게는 성당에 오는 것만으로도 천국에 온 듯한 느낌을 줬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워낙 아름다운 건물이라 드라마, 영화에도 많이 등장한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수상한 파트너’ ‘정년이’,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등을 여기서 찍었다고 한다.

고즈넉한 들판이 일품인 신리성지. 십자가가 있는 건물은 순교미술관으로 옥상 전망대에서 내포 들판을 보는 눈맛이 일품이다. 당진=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고즈넉한 들판이 일품인 신리성지. 십자가가 있는 건물은 순교미술관으로 옥상 전망대에서 내포 들판을 보는 눈맛이 일품이다. 당진=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내포 평지 한가운데 있는 신리성지는 ‘조선의 카타콤바’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카타콤바는 로마 시대 박해를 피해 숨어서 예배를 드린 지하 묘지를 뜻한다. 1860년대부터 교우촌이 형성된 신리 지역도 워낙 박해가 심해 숨어서 신앙을 이어가던 곳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 등을 거치며 40여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는 이름이 밝혀진 내포 지역 순교자 중 10%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곳에서 순교해 성인이 된 사람만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1818∼1866), 성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1837∼1866), 성 위앵 루카 신부(1836∼1866), 성 황석두 루카(1813∼1866), 성 손자선 토마스(?∼1866) 등 5명에 이른다. 인근에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46기의 무명 순교자 묘지도 있다. 실제 순교자는 이보다 몇 배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저녁 무렵인데도 땅의 열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태양보다 뜨거운 마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걷던 길이어서일까. 종교를 떠나 자신의 삶을 진실함으로 채우려 했던 옛사람의 마음이 느껴지는 하루였다.

#버그내 순례길#솔뫼성지#김대건 신부#합덕성당#신리성지#천주교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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