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복영-오희영-오광심 활약 재조명
1944년 학병들 대규모 탈출 이끌어
광복군 제3지대 성립의 바탕 이뤄
광복군에서 활약한 여성 독립운동가 오광심(왼쪽), 지복영(가운데), 오희영 선생. 동아일보DB
“이중삼중의 압박에 눌리어 신음하던 자매들! 어서 빨리 일어나서 이 민족해방운동의 뜨거운 용로(鎔爐) 속으로 뛰어오라.”
여성 독립운동가 지복영 선생(1920∼2007)이 한국광복군의 기관지 ‘광복(光復)’에 쓴 글 ‘대시대(大時代)는 왔다, 한국 여동지들아 활약하자!’의 일부다. 여성들에게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백범김구기념관과 김구재단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여성 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학술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여성 독립운동’을 지난달 29일 열었다.
이날 학술회의에서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원 연구소장은 ‘한국광복군 여성대원의 활동’을 발표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여성대원들은 초모(모집), 선전, 구호 임무에서 활약했다”고 밝혔다.
김 소장에 따르면 광복군 여성대원들은 일본군 점령 지역에 들어가 공작 거점을 마련해 활동하며 한인 청년들을 포섭했다. 1942년 2월 구성된 징모제6분처에선 여성 광복군 지복영, 오희영(1924∼1969), 오광심(1910∼1976) 선생 등이 활약했다. 이들은 중국 안후이성 푸양(阜陽)에서 광복군의 활동을 선전하고 일본군으로 끌려 나온 학병을 탈출시키거나 첩보 상황을 보고하는 일을 맡았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44년엔 학병들이 대거 탈출하면서 광복군 제3지대가 성립하는 바탕이 됐다.
여성 광복군은 입대 당시 1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이 대부분이었다. 독립운동가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며 광복군에 투신한 경우가 많았다. 지청천 장군(1888∼1957)의 딸인 지복영은 1940년 9월 광복군 창설 당시 입대했다. 임시정부 선전부 자료과와 선전과에 복무하면서 대적 선전방송을 했다. 남편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인 이들도 있었다. 조선혁명군 참모장 김학규(1900∼1967)와 부부의 연을 맺은 오광심은 만주와 임시정부가 있던 난징을 오가며 검문에 발각되지 않도록 200쪽에 이르는 보고서를 암기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명화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이날 발표한 ‘애국부인회를 통한 한국 여성 독립운동의 성격’을 통해 1919년 이후 국내와 중국, 미주, 러시아 등지에서 결성된 항일 애국부인회의 활동을 조명했다. 이 소장은 “애국부인회는 적십자회 조직과 보조를 맞춰 활동했다”며 “동포를 대상으로 한 구제 사업을 목표로 했으나 임시정부의 군사정책, 즉 독립전쟁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이날 학술회의에선 윤정란 숭실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교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모 곽낙원 지사와 조마리아 지사’를, 강영심 전 이화여대 사학과 연구교수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여성의원들’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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