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고전 속 ‘악마 병균’, 시대를 알려주다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9월 13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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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물로 쓴 소설들/고관수 지음/360쪽·2만2000원·계단


“격리되었던 환자들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알몸으로 도망 나와 밤거리를 달려서는 시체들이 묻힌 구덩이를 찾아 주저 없이 뛰어드는 장면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그야말로 죽음을 향한 한밤의 질주인 셈인데, … 산 채로 던져진 환자들이 구덩이 안에서 이미 죽은 시신이나 아직 죽지 않은 다른 환자들과 뒤엉킨 채로 죽음을 기다리는 장면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대니얼 디포(1660∼1731)가 1722년 발표한 ‘전염병 연대기’의 일부다. 중심인물도, 극적인 플롯도 없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사실상 ‘페스트’라고 할 수 있다.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17세기 페스트 대유행의 처참함이 오롯이 전해진다.

미생물학을 전공한 성균관대 의대 교수가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감염병에 관해 쓴 책이다. 한센병 콜레라 매독 성홍열 발진티푸스 말라리아 등 감염병 14개를 다룬다. 병의 증상과 환자의 고통, 병이 남긴 문화적 흔적 등을 여느 논문보다 생생하게 다루는 여러 소설을 살폈다.

19세기 많았던 감염병으론 결핵을 빼놓을 수 없다. ‘제인 에어’ ‘레미제라블’ ‘크눌프’ 등 여러 소설에서 결핵이 등장한다. 결핵과 결핵으로 인한 죽음은 아름답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태준(1904∼1978)은 단편 ‘가마귀’에서 “폣병! … 그렇게 예모 있고 상냥스러운 대화를 직거릴 수 있는 아름다운 입술이 악마 같은 병균을 발산하리라는 사실은 상상만 하기에도 우울하다”고 썼다.

저자는 문학을 감염병의 사회적 의미를 살피는 도구로 활용한다. 우리가 함께 가까스로 통과해 온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팬데믹은 어떤 시대였을까. 소설가 윤고은이 ‘도서관 런웨이’(2021년)에서 묘사한 구절을 읽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법하다.

“누군가의 숨이 위협이 되는 시대, … 안경을 쓰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감염 위험이 적어진다는 통계가 읽히는 시대, 생일 촛불을 입김으로 불어서 끄는 것도 모험이 되는 시대, 거리두기의 시대에 나는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유예하지 못하고 의심하지도 못하고 그 위로 미끄러졌다.”

#문학 작품#감염병#결핵#사회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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