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공간으로 새단장돼 열린 SK 창업주의 옛 사저, 선혜원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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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정신을 바탕으로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SK의 경영철학을 담아 지은 선혜원. 중심 건물인 경흥각 지붕 위 잡상이 이를 표현한다.
창업 정신을 바탕으로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SK의 경영철학을 담아 지은 선혜원. 중심 건물인 경흥각 지붕 위 잡상이 이를 표현한다.
높다란 담장 너머로 분홍빛 배롱나무꽃이 고운 인사를 건넨다. 고(故) 최종건 SK그룹 창업 주가 1968년 매입해 생의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옛 사저 ‘선혜원(鮮慧院)’이다. SK그룹 직원 연수원과 영빈관으로 활용되다가 최근 새 단장을 마치고 일반에 공개됐다.

SK가 이곳의 문을 연 방식은 ‘선혜원 아트 프로젝트’다. 제주 포도뮤지엄이 개념미술 작가 김수자(68)의 ‘호흡-선혜원’ 전시를 여는 것으로 시작했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 피노 컬렉션의 원형 홀 바닥을 거울로 덮었던 작가는 이번엔 선혜원의 한옥 전각 ‘경흥각(京興閣)’ 마룻바닥에 수백 개의 거울 패널을 깔았다. 마치 고요한 물 위를 걷는 것 같다. 거울에 반사된 나무 기둥과 서까래가 명상에 가까운 몰입을 유도한다.

선혜원은 본래 양옥 저택이었다. SKM아키텍츠,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가 이끄는 온지음 집공방이 협업해 현대 건축 위에 세 채의 한옥이 어우러지는 구조로 탈바꿈시켰다. 관람객은 한옥과 현대미술의 ‘찰떡궁합’에 반해 전시만 보고 돌아서기 쉽지만, 장소 그 자체로 세심하게 살펴볼 가치가 있다. SK 창업 정신의 한국적 재해석이기 때문이다.

‘선혜원 아트 프로젝트’의 첫 시작은 김수자 작가의 전시 ‘호흡-선혜원’이다. 마룻바닥에 수백 개 거울을 깔아 명상적 몰입을 유도하고, 대표 연작인 ‘보따리’를 통해 삶의 흔적을 이야기한다.
‘선혜원 아트 프로젝트’의 첫 시작은 김수자 작가의 전시 ‘호흡-선혜원’이다. 마룻바닥에 수백 개 거울을 깔아 명상적 몰입을 유도하고, 대표 연작인 ‘보따리’를 통해 삶의 흔적을 이야기한다.
경흥각의 전시를 체험하고 나오면 내부 동선으로 두 번째 건물인 ‘하린당(賀隣堂)’이 이어진다. 1층은 현대식, 2층은 한옥 형태다. 마르지 않은 백자토에 바늘로 구멍을 뚫은 평면 작품, 작가의 대표 연작인 ‘보따리’ 등이 전시돼 있다. ‘김수자표’ 보따리는 이주와 디아스포라(유랑민족)의 상징이자, 삶의 흔적을 품는다.

세 번째 한옥은 ‘동여루(同輿樓)’다. 경흥각, 하린당, 동여루가 ‘ㄷ’자 형태로 마당을 두르기 때문에 동여루에서 경흥각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게 경흥각 지붕 처마 끝의 ‘잡상(雜像)’이다. 잡상은 전통 건축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기와지붕 끝에 올리는 장식 기와다. 경흥각 왼쪽 지붕 위에는 ‘건(建)’, ‘현(賢)’, ‘원(源)’ 등 7개의 한자 형태 잡상이 얹혀 있다. 고 최종건 창업주, 고 최종현 선대 회장, 최태원 회장 등으로 이어지는 선대의 철학과 SK의 정체성을 시각화했다. 오른쪽 지붕 위 토우(흙으로 빚은 작은 인형)들은 SUPEX(SUPER EXCELLENT의 준말로, 고 최종현 선대회장의 경영방식)같은 기업 철학을 담은 작은 영문 표기를 품에 안고 있다. 잡상을 활용한 브랜딩은 최태원 회장이 직접 제안했다고 한다.

세 채의 한옥 이름도 SK의 정신을 담았다. ‘경흥각’은 ‘SK 전신인 선경(鮮京)을 흥하게 하자’는 뜻이다. ‘하린당’은 ‘이웃을 돕는다’, ‘동여루’는 ‘사회와 함께 간다’는 의미다.
한옥을 설계한 건축가 김봉렬 교수는 말한다. “세 채의 한옥을 하나의 집으로 보면 됩니다. 각 한옥은 방이고, 가운데 마당은 로비인 셈이죠. 경흥각은 연회를 여는 컨벤션홀, 하린당은 개념상 침실, 동여루는 찻집 역할을 합니다. 각 건물은 내부와 지하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됩니다.”

지하 공간도 전통 한옥 구조에 맞춰 정교하게 설계됐다. SKM아키텍츠의 민성진 대표는 “모던한 건축이 한옥과 어우러지는 데 주력해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지었다”고 했다. 선혜원의 건축과 역사, SK의 창업 철학을 소개하는 상설 전시관도 지하 공간에 곧 선보일 계획이다. 과거 기업의 영빈관이 일반 시민도 누릴 수 있는 공공의 문화 공간으로 거듭나는 셈이다.

조경은 은근하고 절제돼 있다. 전통 화계(花階·꽃계단)를 구현했으면서도 어딘가 현대적이고 단아한 화단이 건축물과 어우러진다. 햇빛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며 하얀 담벼락에 그림자를 그려 넣는다. 조경을 맡은 최재혁 BEOH 대표는 “큰 숲이 집을 품는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며 “전통 철쭉, 산단풍, 소나무, 매실나무 등을 심고 돌의 문양과 물의 흐름에는 정적인 미감(美感)을 담았다”고 말했다.

선혜원에는 ‘시크릿가든’이 있었다. ‘선후원(鮮後園)’이라는 이름의 후원(건물 뒷편 정원)이다. 고 최종건 창업주 시절의 오래된 나무들을 남기고, 직사각형 연못을 만들어 정원을 꾸몄다. 최태원 회장 등 SK 일가가 어린 시절 뛰놀던 기억이 남아 있는 장소에 바위와 고사리로 깊은 산 속 옹달샘 느낌도 냈다. 후원 조성은 마무리됐지만, SK 측은 아직 이 비밀의 정원을 대중에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SK의 전신인 ‘선경’이 수원에서 출발했다면, SK는 선혜원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업 정신이 싹튼 장소, 선혜원이 이제 대중을 만난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과거와 현재, 기업과 예술, 전통과 현대를 날실과 씨실로 엮으려 한 노력이 보인다. 옛 정신 위에 오늘의 나무 그림자가 반짝이는 이 공간은 아직 쓰이지 않은 미래의 정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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