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기담∼ 그것이 돌아왔다 [맛있는 중고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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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DRI  AI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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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이번 여름엔 새벽에 폭우가 잦았습니다. 그날도, 인정사정없이 쏟아지는 빗소리에 눈을 떴을 겁니다. 공기는 서늘했지만 얼굴에 끈끈하게 머리카락이 달라붙었어요. 침대 끝에 어슴푸레,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어요. 옆에 놓인 검은 의자에 낯선 어르신이 있었고요. 노인은 잔뜩 화가 났더군요. 두 노인이 모두 눈을 감고 있어서 이상하긴 했어요. “가구들을 잃어버려서 찾으러 다니다 여기서 내 의자를 찾았지. 내 의자에 고양이가 앉아있네. 이 털들!” 엄마는 말했어요. “애초에 남이 쓰던 의자를 들이지 말라고 했건만, 쯧.” 곧 어르신은 의자 속으로 빠져들며 버둥거리는 팔로 팔걸이를 세게 움켜쥐었어요. 손가락의 뼈가 솟아오르고 검버섯이 금니처럼 빛났어요. 그의 두텁고 긴 손톱이 가죽을 찢을 듯한 찰라. “어르신, 그 의자 정품 ‘임스’예요. 손잡이를 그렇게 세게 쥐면 안됩니다! 이 의자 제가 당근에서 샀고요. 중고거래 특성상 교환 환불은 안돼요.”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졌어요. 모든 공기의 진동이 멈추었다고 느꼈죠. 이쯤 되자 깨달았어요. 비오는 한밤중에 낯선 노인이 의자를 달라고 한다, 나는 태연하게 중고거래 매너를 요구한다, 무엇보다 병원에 입원 중인 엄마가 내 침대에 앉아있다, 는 것은 꿈이니까 가능하다. 고양이를 부르며 의자로 다가갔어요. 막 누군가 앉았던 의자의 중심은 살짝 가라앉아 있었고, 손잡이엔 작고 깊은 상처가 있었어요. 노인이 세게 쥐었던 바로 그 자리. 의자를 살 때 보지 못했나.

내가 중고앱을 통해 의자를 사고 파는 것을 보며 “남이 쓰던 물건을 들여놓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지 않아?”라고 조심스럽게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람이 오래 사용한 물건에 감정 혹은 영혼이 깃든다는 생각은 동서고금 어느 문화권에나 있어요. 유럽이나 북미에서는 이를 영혼, 과학적인 용어로 ‘잔류 에너지’라고 부르죠.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선 ‘기운’이라는 말을 씁니다. 일본에서는 오래된 물건이 요괴가 된다며, 이를 ‘쓰쿠모가미’라고 합니다(요즘 선풍적 인기를 끄는 ‘귀멸의 칼날’을 보시라).

중고물건을 거래하는 당근 유니버스는 ‘영혼’들로 붐빌 수밖에요. 구매자는 긍정적이고 선량한 영혼이 깃든 물건을 찾습니다. 어떻게 알아볼까요? 누가 어떻게 사용했고, 왜 파는지, 즉 물건의 스토리가 물건의 영혼이자 기운이죠. 나의 경우, 유독 몸의 형태를 그대로 닮은 가구, 의자를 보면 어떤 사람이 앉아있었을까를 그려봅니다. 그래서 누군가 잘 사용했고 정이 든 의자보다는 상업공간에서 오브제로만 사용했다든지 컬렉션으로 사모았다고 소개된 의자를 선호하게 돼요. 영혼 없는 의자를 찾는다고나 할까요. 부드러운 가죽으로 몸을 감싸는 의자보다 딱딱한 의자를 선호하는 것도 ‘반듯한 의자에 반듯한 영혼이 깃든다’는, 나름의 애니미즘이 작동한 결과일지도 몰라요.

요즘 중고거래사이트는 ‘전 약혼자에게 선물했던 명품을 판다’는 ‘사기’ 판매자(들?)로 소란스럽습니다. 새상품같은 명품 사진을 올려놓고 ‘약혼자의 불미스런 행동으로 파혼했는데, 물건 볼 때마다 기분이 나빠서 싸게 판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수상쩍었는데, 역시나 피해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남의 블로그에 있는 언박싱 사진을 훔쳐다 올려놓고 구매자가 입금을 하면 소식을 끊는 전형적인 중고 거래 사기죠. 나쁜 영혼이 붙어있는 물건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판매자의 글이 무례하고 조급하며 불쾌하다면 거래를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악질적인 범죄까지는 아니더라도, 재수가 없는 경험을 할 확률이 높습니다.

검은색 임스 의자는, 사실 구매한 적이 없습니다. 오래 전 쇼핑 리스트에 올려놓았고 중고 매물이 나오면 바로 알 수 있도록 알림 설정도 해놓은 ‘머스트해브’인지라, 납량특집 꿈의 주인공이 됐나 봅니다. 단언컨대, 나는 물건에 깃든 영혼 따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만, 일종의 부적으로서 정성을 다해 구매후기를 쓰곤 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의자를 얻다니 운이 좋았어요’. 오래된 물건, 새로운 행운. 혹시 의자에 영혼이 있어 이 말을 듣는다면 기쁘길 바라면서요.

#Goldengirl#골든걸#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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