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 치료제의 명과 암
평생 과체중… 덫에 걸린 듯 무력… 위고비 복용 6개월 만에 9.5kg 빼
약물로 입맛 떨쳐내는 현실에 의문… 세계 전문가 100명 만나 비만 탐구
“위고비는 선택… 식품환경 바꿔야”
‘매직필’ 요한 하리
황제, 원푸드, 덴마크, 지중해식, 디톡스, 키토제닉….
인류의 다이어트 역사는 유구하다. 고대 절식법부터 기적의 식단과 각종 보조제까지. 수천 가지 방법을 넘나들며 살 빼기에 도전해 왔다. 대부분 다이어트는 실패로 끝나곤 한다. 일정 체중을 유지하려는 인체 항상성을 의지로 이겨내기 어려워서다.
비만 치료제 위고비는 이런 다이어트 패러다임을 바꾸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식욕을 의지로 다스리는 대신 식욕 자체를 줄여 버리며 ‘마법의 약물’이란 별칭까지 얻었다. 위고비는 포만감을 관장하는 글루카곤 유사펩티드-1(GLP-1) 호르몬을 활용해 식욕을 떨어뜨린다. 원래 오젬픽이라는 당뇨병 치료제로 개발됐다가 체중 감량 효과가 확인되자 용량과 이름을 바꿔 2021년 6월 재출시했다. 일주일에 주사 한 번으로 15% 체중 감량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도 지난해 10월 공식 출시됐다.
베스트셀러 ‘도둑맞은 집중력’ 작가인 영국 저널리스트 요한 하리도 위고비(오젬픽)로 다이어트했다. 복용 직후 살이 죽죽 빠지더니 6개월 만에 9.5kg을 줄였다. 건강해진 몸과 다소 차분해진 기분 그리고 메스꺼움을 겪으며 그의 생각은 사방으로 가지를 뻗었다. ‘인간은 언제부터 살이 쪘나’ ‘약으로 살을 빼는 건 반칙일까’ ‘아이들이 약을 복용해도 될까’…. 복용 경험과 세계 각국 전문가 100명을 인터뷰한 내용을 책 ‘매직필(Magic Pill)’로 엮어 냈다.
요한 하리가 비만치료제 오젬픽을 맞기 전과 후. 키 173cm에 92kg에서 6개월 만에 9.5kg이 빠졌고 몇 달 후 7kg이 더 빠졌다. 어크로스 제공―‘매직필’을 펴낸 계기는.
“2022년 겨울 몇 년 만에 파티에 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다른 이들도 나처럼 살이 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대부분 할리우드 스타인 참석자들은 오히려 더 야위어 보였다. 누군가 ‘오젬픽을 복용한 덕분’이라고 귀띔해 줬다. 그 순간 생명수를 만난 듯한 설렘과 정체 모를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나는 평생 비만으로 살았고, 할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가족이 비만으로 병을 얻어 단명했다. 비만 치료제의 실체를 직접 파헤치고 싶었다.”
―약을 복용한 첫날은 어땠나.
“잠에서 깼는데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점심으로 평소 좋아하던 샌드위치를 몇 입 먹고 나니 배가 불렀다. 복용 첫 주에는 물 한 컵만 마셔도 포만감을 느꼈다.”
―계속 복용하면서 어떤 변화를 겪었나.
“처음엔 속이 메스껍다가 점차 괜찮아졌다. 기존 체중의 18%를 빼니 허리 통증이 사라졌다. 한데 초반에 급격히 살이 빠지면서 감정이 둔해졌다. 지인의 죽음을 취재하며 KFC 치킨을 먹다 깨달았다. ‘이제 음식으로는 감정을 달랠 수 없구나.’”
―‘음식의 위로’를 잃은 상실감이 컸나.
“혼란스럽고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란 내게 음식은 감정 조절 수단이었다. 음식을 먹으면 불안이 잦아들었다. 그 버팀목이 사라지자 정서적 균형을 다시 잡아야 했다. 의학계에 따르면 위 절제술을 받은 이들의 자살 위험은 네 배로 높아진다고 한다. 약을 복용하기 전 고려해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더 마르기 위한 복용은 제한해야”
위고비와 연관된 것으로 알려진 잠재 위험은 다양하다. 갑상선암, 췌장염, 위 마비, 근 손실이 대표적이다. 오젬픽과 위고비를 만드는 제약사 노보노디스크는 “해당 약물은 광범위한 임상 시험을 거쳐 15년 이상 당뇨병 치료에, 8년간 비만 치료에 사용됐다”며 안정성을 강조하고 있다.
―위고비와 관련한 안전성 우려가 적지 않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섭식 장애를 가진 사람이다. 이 약을 복용하면 극도로 마르거나 심지어 죽음에 이를 수 있다. 비만 환자에게는 접근성을 높이되, 정상 체중이거나 마른 사람이 ‘더 마르기 위해’ 복용하는 경우엔 제한해야 한다. 철저한 관리 감독이 필요하다.”
―비만의 부정적 영향과 위고비 부작용을 비교한다면.
“비만으로 오랜 허리 통증에 시달렸다. 내 몸이 싫었고 비만 때문에 아픈 가족을 보며 불안에 떨었다. 오젬픽을 복용한 뒤 이런 문제가 사라졌다. 초기 몇 달 간 가벼운 메스꺼움과 감정적 동요를 겪었지만 긍정적 영향이 더 컸다. 내 책에서 위고비의 12가지 잠재적 위험을 다뤘다. 약물의 위험도 물론 파악해야 하지만 비만 자체가 훨씬 더 치명적이라고 생각한다.”
―약물의 도움으로 날씬해지자 ‘사기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비만을 죄악시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자랐다. 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오젬픽은 너무 쉬워서 사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왜 비만 치료제에만 시비를 걸지? 약물로 콜레스테롤을 조절하는 친구에겐 누구도 속임수를 쓴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스마트폰 발명과 위고비 파급력이 맞먹는다는 의견도 있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절반이 이 약물 복용을 고려하겠다고 했다. 10년 안에 글로벌 시장 규모는 2000억 달러(약 276조 원)에 이를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일론 머스크나 오프라 윈프리 같은 공인도 위고비 복용을 공개했다. 위고비는 피임약, 프로작(우울증 치료제)과 더불어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상징적 약이라고 생각한다.”
● 초가공식품으로 비만 급증
폴 케니 미국 마운트 시나이 아이칸 의대 교수가 ‘치즈 케이크 놀이동산’ 실험을 했다. 신선한 자연식을 먹고 자란 쥐는 허기질 때만 음식을 섭취한 반면, 치즈케이크 같은 가공식품을 맛본 쥐는 굶고 있음에도 일반 사료에 입을 대지 않았다. 하리는 “초(超)가공식품은 ‘배부르다’는 신호를 무너뜨려 끝없이 먹게 만든다”며 “가공식품 탐식이 현대의 비만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의학계에선 비만 원인을 유전, 심리적 요인, 식습관 등으로 보고 있다.
―비만 급증 원인으로 가공식품을 지목했다.
“(내가 태어난) 1979년부터 21세가 되던 해까지 미국 비만율은 두 배로 늘었고, 이후 20년 동안 중증 비만율은 두 배로 증가했다. 한국은 이 정도로 극적이지는 않지만 빠르게 상승하는 추세다. 과거 인류는 신선한 재료를 그날그날 조리해서 먹었다. 19세기 이후 공장에서 화학적으로 제조한 초가공식품을 먹기 시작했다. 그 뒤로 비만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장기적으로 다이어트는 80% 이상 실패한다.
“기근 위협에 시달리던 과거엔 살을 찌우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다. 음식이 풍족한 지금도 뇌는 계속 체중을 유지하려 한다. 이런 몸의 저항을 의지만으론 이기기 힘들다. 그래서 비만 치료제는 게임체인저가 된다. 약을 복용하면 더 이상 내 몸과 싸울 필요가 없어지니까.”
―‘위고비는 인위적인 해결책’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의도는 이해하지만 동의하지는 않는다. 장기적으로는 식품 시스템을 바로잡는 게 맞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비만 환자들은 ‘바로 지금’ 심각한 건강 위험에 직면했다. 이 약은 이런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이다. 나는 비만이라는 덫에 걸렸고, 이 약은 덫을 헤쳐 나갈 비상문이다. 완벽하진 않지만 현재로선 유일한 출구인 셈이다.”
―이미 공고해진 식품 환경을 바꾸려면.
“제도를 바꿔야 한다. 멕시코는 설탕세를 도입해 가당(加糖) 음료 소비를 크게 줄였다. 네덜란드는 비만 아동에게 개인 코치 등을 지원해 비만율을 줄였다. 영국 정부는 빵의 소금 함량을 줄이도록 식품업계를 압박해 매년 뇌졸중 환자가 9000명가량 줄었다.”
―아동의 위고비 복용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10대에 대한 임상 실험은 고무적인 결과를 보였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의학계에선 발달 단계에 있는 아동은 많은 칼로리가 필요하기에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금이라도 (식품) 기업 이윤 때문에 아이들 입맛과 건강을 해치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 ● “마른 몸 신화 맹신해선 안돼”
―많은 사람이 건강을 해치면서 마른 몸을 추구한다.
“사회가 자신의 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도록 강요한다. 여성에게 특히 가혹하다. 가부장적 권력이 여성을 통제하는 방식의 일부다. 여성이 자신의 몸을 미워하는 데 몰두하도록 만들어, 그 에너지가 삶을 충만하게 사는 데 쓰이지 못하도록 한다.”
―비만을 질환으로 보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몸을 긍정하자는 ‘자기 몸 긍정주의 운동’이 힘을 잃기도 한다.
“자기 몸 긍정주의 활동가들은 ‘뚱뚱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잔인하고 비도덕적’이라고 주장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비만이 건강 문제를 일으킨다는 건 신화’라는 일부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비만이 건강을 해치는 건 증명됐다. 18세에 비만이면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70%에 달한다. 암 발생 위험도 높인다. 체지방이 몸 전체에 신호를 보내 세포 분열을 촉진하는 과정이 암을 유발할 수 있다.”
―책에서 신약의 희망과 위험을 골고루 다뤘다.
“정상 체중이거나 저체중인데 체중 조절의 압박을 느낀다면, 그건 분명 해롭다. ‘병적인 마름’을 숭배하도록 만든 사회엔 저항해야 한다. 과체중으로 인한 우울감 또한 상당하다. 나는 해로운 덫에 빠진 무력감에 평생 시달렸다. 비만 치료제는 새로운 선택지다. 의학적 의사 결정에 앞서 책과 인터뷰가 나침반 역할을 하길 바란다.”
요한 하리
영국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사회과학과 정치과학을 전공했다. 현대인의 집중력 위기를 다룬 ‘도둑맞은 집중력’, 비만의 사회과학적 의미를 파헤친 ‘매직필’, 중독 문제를 다룬 ‘Chasing the Scream(비명의 추격, 한국 미출간)’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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