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의 시간은 ‘조선시대’로 흐른다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9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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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배경에 판타지 가미 ‘팩션’ 뮤지컬 잇따라
“사도세자가 시간 여행으로 어린 영조 만난다면…”
타임슬립 상상서 출발한 뮤지컬 ‘쉐도우’… ‘한복 입은 남자’는 장영실이 주인공
“기존엔 서양 배경 많았지만 점차 우리 역사 활용한 창작 흐름 활발”

“조선시대에도 프랑스 요리를 하는 셰프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웹소설 ‘연산군의 셰프로 살아남기’를 원작으로 한 tvN 드라마 ‘폭군의 셰프’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이런 현대적 상상력을 덧입힌 작품이다. 역사와 판타지를 섞은 신선한 발상으로 최근 넷플릭스 비영어 쇼 부문 주간 1위에 오르는 등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 공연계에서도 대중에게 비교적 가깝고 친근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흥미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창작물들이 연이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서양 역사나 인물을 주로 내세웠던 기존 흐름을 벗어나 우리 역사를 소재로 하되 타임루프와 판타지 같은 장치를 가미해 새롭게 풀어낸 ‘팩션’(팩트+픽션) 뮤지컬이 주목받고 있다.

● 조선시대와 타임슬립의 결합

조선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부자(父子) 관계로 꼽히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타임슬립 판타지로 풀어낸 뮤지컬 ‘쉐도우’. 블루스테이지 제공
조선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부자(父子) 관계로 꼽히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타임슬립 판타지로 풀어낸 뮤지컬 ‘쉐도우’. 블루스테이지 제공
이달 5일 서울 강남구 백암아트홀에서 개막한 록 뮤지컬 ‘쉐도우’는 1762년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임오화변’을 모티브로 한다. 사도세자가 시간 여행을 해 어린 영조를 다시 만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상상에서 출발한 타임슬립물이다.

극은 냉혹한 군주가 아닌, 두려움과 외로움에 짓눌린 소년 영조와 마주한 사도세자의 내면을 섬세하게 따라간다. 사도세자가 실제로 읽었다는 기록이 있는 경전인 ‘옥추경’이 타임슬립의 매개로 등장해 흥미를 더한다. 뒤주 역시 단순한 형벌 도구가 아니라 시간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통로로 설정됐다. 특히 뒤주 아래에 카메라를 설치해 관객들이 뒤주 안 사도세자의 표정을 볼 수 있도록 연출했다.

조선시대 과학자 장영실이 이탈리아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난다는 상상력을 발휘한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조선시대 과학자 장영실이 이탈리아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난다는 상상력을 발휘한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EMK뮤지컬컴퍼니가 12월 2일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선보이는 ‘한복 입은 남자’도 조선시대 사건에 상상력을 결합한 사례다. 이상훈 작가의 동명 장편소설이 원작으로, 세종의 총애를 받던 과학자 장영실이 가마가 부서진 사고로 인해 문책을 받은 뒤 갑자기 기록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사실에 주목하며 “혹시 장영실이 유럽으로 건너가 어린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난 게 아닐까”라는 상상을 펼친다.

뮤지컬 무대는 1막 조선, 2막 유럽으로 나뉘어 전혀 다른 두 장소를 넘나든다. 모든 배역이 1인 2역으로 짜였는데 세종과 방송 PD 진석, 장영실과 학자 강배를 각각 같은 배우가 연기한다. 배역으로도 현재와 과거를 잇는 셈이다.

K팝과 한국사가 결합한 색다른 시도도 있다. 11월 13일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개막하는 가족극 ‘조선 마법사관 진준’은 100만 구독자를 보유한 형제 유튜버이자 K팝 듀오인 ‘진’과 ‘준’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정체불명의 DM을 받고 조선 마법사관부에 소환되고,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가로막으려는 비밀 조직과 맞서 싸우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한국사의 주요 인물들이 자연스레 등장하게 된다.

● “정공법 대신 상상력으로 현대에 소환”

최근 조선시대를 소재로 한 창작 뮤지컬이 잇따라 주목받는 것은 창작의 무게중심이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다. 예전엔 서양 고전이나 역사에서 빌려온 작품들이 주류를 이뤘지만, 이제는 우리의 역사와 인물을 소재로 한 뮤지컬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조(時調)가 금지된 가상의 조선에서 백성들이 비밀 시조단 ‘골빈당’을 만들어 연대하는 과정을 그려낸 뮤지컬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이 최근 영국 웨스트엔드 무대에 진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연계의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해외 영웅이나 서양 인물을 무대에 올려야 관객이 공감할 거라는 사대주의도 있었지만, 국내 뮤지컬 수준이 발전한 현재는 우리의 역사를 활용한 창작 흐름이 활발해졌다”고 말했다. 최승연 뮤지컬 평론가는 “특정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정공법으로 기록하는 대신 상상력으로 새롭게 현대에 소환하는 방식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디테일을 드러내도록 한다”며 “이런 흐름이 한국 뮤지컬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고 있다”고 평가했다.

#조선시대#뮤지컬#타임슬립#팩션#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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