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부. ‘같은 편’, 나아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의미의 은어(속어)죠. 제아무리 모두 갖춘 인생이라도 건전하게 교감하는 평생의 벗이 없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좋은 인간관계는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깐부들 사이에 피어나는 ‘같이의 가치’를 소개합니다.
박상철 대한가수협회 회장(오른쪽)님 덕에 ‘인증 가수’ 됐다고 좋아하는 이범학. 신인가수 기분으로 절친 박상철과 찰칵.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이 배지, 정말 멋있는데? 국회의원 배지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
가수 이범학은 1991년 그룹 ‘이색지대’로 데뷔했다. 지금도 국민 감성 발라드로 꼽히는 ‘이별 아닌 이별’로 큰 사랑을 받았다. 그가 2일 서울 여의도 대한가수협회 사무실을 찾았다. 아주 기쁘게 회원 등록을 하고 회원 카드도 발급 받았다. 옷에는 가수협회 배지를 자랑스럽게 달아봤다.
노래 말고도 인생은 바빴다. 꼭 가수협회 회원으로 가입을 해야하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그런데 ‘누구’ 때문에 한걸음에 찾아와 가입했다. ‘무조건’, ‘자옥아’, ‘황진이’를 히트시킨 트로트 스타인 박상철이다. 박상철은 지난 8월 선거를 통해 제8대 대한가수협회 회장에 당선됐다. 이범학은 “연극인협회에는 오래 전에 가입을 했었다. 상철이가 후보로 나왔을 때 정회원으로 등록했다면 힘이 됐을텐데 그러질 못했다. 어찌됐건 상철이 때문에 이제 ‘인증 가수’가 됐다. 가수협회 배지를 매일 꽂고 다닐 것”이라며 웃었다.
감성 발라드 ‘이별 아닌 이별’의 이범학과 국민 가요 ‘무조건’의 주인공인 박상철은 늘 진심을 나누는 인생 동반자다. 출처=KBS 가요톱텐/ 가요베스트 유튜브
● 내 안의 선한 진심을 항상 끌어내는 사람
2살 터울인 둘은 짧은 시간에 묶였다. 하지만 결합이 아주 단단한 인생 동반자다. 형 이범학에게 동생 박상철은 ‘이범학’ 본연의 선한 진심을 계속 이끌어내는 사람이다. “쟤 때문에 내가 계속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다”고 한다. 자신도 몰랐던, 자신 안의 여러 선한 진심을 알게 했다. 이범학은 박상철 때문에 계속 둥근 사람이 된다고 한다. 유난히 잘해주고 싶고,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을 다양하게 표현하게끔 한다. 박상철과 가깝게 지내면서 사람 이해하고 생각하는 진심의 가짓수가 크게 늘어남을 느낀다. 박상철은 이범학에게 하루에도 몇 번이고 “형님, 너무 고맙습니다. 감동입니다”라는 말을 한다. “의례적으로 하는 가식이 아니다”라며 동생으로부터 진심어린 겸손을 배운다.
박상철은 이범학 때문에 감동을 받는 마음의 그릇 크기가 커졌다. 어릴 때부터 치열하게 살고 버티느라 누가 배려해주는지도, 긍정적 반응을 할 줄도 잘 몰랐다. 이범학을 만나면서 말이 통하는 사람과 공유하는 작은 일상, 그 사람이 주는 배려의 감사함을 알았다. 지금은 이범학의 인간적 배려를 여러 감동의 스펙트럼으로 쪼갤 줄 안다. 새로운 습관도 생겼다. 그런 자신을 ‘이범학’에 매일 얘기하고 보여주는 일이다. 대한가수협회장에 당선되고도 가장 먼저 이범학을 찾았다.
● 앞뒤가 똑같아 반한 우리
이범학은 따뜻함과 담담한 감정선을 갖고 노래의 여백과 고요함의 미학을 잘 살렸던 발라드 가수다. 박상철은 산전수전 경험에서 나오는 에너지와 흥으로 서민들의 정서를 신명나게 파고들었던 트로트 가수다. 둘의 만남? 우정? 접점이 많진 않아 의외다.
이범학은 1991~1992년 ‘이별 아닌 이별’, ‘마음의 거리’를 연이어 히트시키며 가요계 최정상을 찍었다. MBC ‘이경규의 몰래카메라’에서는 짜놓은 ‘가짜’ 장학퀴즈에서 인기 연예인 문제 출제자로 나와 속임수에 넘어가는 순수한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면서 전국구 사랑을 받았다.
박상철은 이범학과는 세상 반대편에 있었다. 밑바닥 생계를 이어가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그러다 1993년 ‘전국노래자랑’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가수가 되고픈 꿈에 작은 바늘구멍을 뚫었지만 당장 ‘대박’이 터지진 않았다. 밤낮으로 현장형 가수로 뛰어도 현실은 냉담했다. ‘박상철’ 이라는 이름이 익숙해지기까지 참으로 긴 무명 생활을 보내야 했다.
2000년 ‘부메랑’으로 데뷔했지만 노출이 거의 안 됐다. 가뜩이나 당시 트로트 시장이 침체기여서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무명 생활의 간절함, 밑바닥 인생에서 탈출하려는 몸부림을 2005년에 세상이 알아줬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직진형 진심을 담은 ‘무조건’이 대박을 터뜨린 것. 박성철 인생의 기적인 ‘무조건’은 지금도 전국 행사장, 노래방, 방송을 모조리 휩쓰는 국민 가요다.
강원도 삼척에서 가수의 꿈을 키우다 1993년 KBS ‘전국노래자랑’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인생 길이 열렸다. 출처=KBS 전국노래자랑 유튜브 삶의 여정이 안 닮은 둘이 어떻게 ‘인연의 복’으로 연결됐을까.
“2001년쯤으로 기억해요. 사실 저는 1993년부터 하락세였어요. 1992년에 마지막 앨범을 내고 20년 동안 못 내고 있던 때였죠. 그 무렵 상철이를 행사에서 몇 번 본 거예요. 첫 인상이 너무나 겸손했어요. 제 세대는 선배들에게 인사 잘하고 존댓말 잘하면 일단 ‘사람이 됐구나’ 하잖아요. 인사성이 사람 평가의 잣대였잖아요. 그런데 인사성이 너무 밝았어요. 그렇다고 서로 밥 한끼 먹는 사이까진 아니었어요. 얼굴만 아는 정도였죠. 공연에서 가끔 마주치면 인사하는 정도로 지나갔는데, 우연치 않게 가수 홍서범 형이 만든 연예인 야구동아리 ‘공놀이야’에 들어갔더니 상철이가 있는 거예요.”
둘의 ‘우정이야’의 시작이다. ‘무조건’으로 최고의 트로트 스타로 올라섰을 때였다.어지간한 사람이면 어깨 힘이 한껏 들어갔을텐데.
“아니요. 상철이는 그 때도 막내 같더라고. 선배든 후배든 정말 싹싹하게 대해줬어요. ‘정말 괜찮은 친구네’라고 확신을 했죠. 이 때도 절친이 될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우리는 정말 거역할 수 없는 인연이었더라고요. 나중에….”
6년 전 쯤이다. 한 건물에서 둘이 또 우연히 만났다, 각자의 일로. 이범학이 경기도 일산 식사동에 음식점을 오픈했는데, 같은 건물에 박상철의 작업실이 있었던 것. 서로 몰랐다. ‘우연히’다. 매일 보게 됐다. 자연스럽게 서로 살아온, 살아갈 얘기를 나누게 됐다. 약간의 어색함이 사라졌다. 그게 걷히니 깊은 인품이 보였다.
식당 일에 집중하기 위해 외부 활동을 자제했던 이범학은 박상철과 술 한 잔 기울이면서 사는 얘기하는 것이 낙이 됐다. 당시 박상철은 사생활 논란으로 마음 고생을 적잖이 했던 시기. 답답한 마음이 생기면 식당으로 가져왔다. 이범학 앞에서 하소연으로 풀었다. 이범학은 그 하소연을 ‘요리’했다. 따뜻하게 있는 그대로 흡수해 격려로 돌려줬다. 애매한 지적과 질책은 안 했다. 자신보다 고생을 더 한 동생이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인생 코치할 자격은 없다고 봤다.
동생 입장에선 형의 요리로 숨을 쉬고 살 수 있었다.
“범학 형님이 그 때 유일한 저의 어른이었어요. 저의 고민을 그냥 맑고 깨끗함으로 정화해 돌려주셨어요. 그런 일상이 어떻게 소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형이 안 계셨다면 작업실에 처 박혀서만 있었겠죠. 하루가 정말 길었을 거예요. 무작정 형님 식당에 내려가서 밥도 먹고 얘기하고, 형님이 툭 건네주는 미소에 한 번 웃고 나면 책도 볼 여유도 생기고, 마음 붙잡고 곡을 쓸 마음도 생겨요. 그러면 밤이 돼요.”
동생에게 절대적인 공감대를 형성해주고 하소연을 받아준 이유가 있었다.
“제가 누구한테 우리 상철이를 소개할 때 앞뒤가 똑같은 사람, 늘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해요. 살면서 부침도 많았을텐데 잘 나갈 때는 건방 떨지 않고, 일이 잘 안 풀릴 때도 오히려 더 살갑게 사람을 대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인품에 제가 반할 수 밖에 없었어요. 동생에게 배려했다고 생각 안 해요. 제가 끌린 거죠.”
“저도 마찬가지에요. 형님은 안 따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범학을 만나보면 나쁘게 얘기하는 사람 한 명도 없을 거라는 예요. 상대의 인생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의 심정을 알아주는 배려는 정말 어떤 사람에게서도 못 봤습니다.” -형이 받는 마음의 위안도 있을텐데.
“저라고 왜 힘들 때가 없었겠어요. 가수로 대중들에게 점점 잊혀지는 두려움은 오히려 없었어요. 일산으로 식당을 옮길 때 상황이 좋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상철이를 만나니까 저도 의지를 하고 있더라고요. 친해진 기간이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관계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것 같아요.”
이제 같이 안 다니면 서운하다. 최근 방송에도 함께 출연해 우정을 과시한 두 사람. 출처=KBS 유튜브 야구에서 두 손가락에 공을 끼워 던지는 포크볼은 투수가 삼진을 잡기 위해 쓰는 결정구 중 하나다. 직구처럼 오다 타자 눈 앞에서 뚝 떨어지는 구질이다. 직구와 슬라이더가 강한 ‘파워 피처’들이 투구 패턴의 변화를 주고 업그레이드하려 할 때 장착하는 구종이다.
이범학은 2012년 트로트 곡 ‘이대팔(2대 8)’을 냈다. 당시 노래하는 ‘원조 미남 오빠’가 20여 년만에 트로트로 귀환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었다. ‘이대팔’은 촌스러운 헤어 스타일이다. 의미를 확장시켜 촌스럽지만 진정성 있는 사람을 알리려고 했다. 나름 큰 변신이었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 가수 이범학에게 주어진 ‘현대적 생존’의 숙제가 주어졌다. 풀고 싶었다. 멀어진 대중과의 거리, 어떻게 좁힐까 고민했다.
“직구와 슬라이더만 있었는데 포크볼을 장착하면? 이런 거죠. 트로트 곡을 냈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상상을 해봤어요. 느닷없이 장르를 바꾸니 ‘이범학 쟤가 돈이 없나”라고 보시는 분도 있겠죠. 시각이 다양할 수 있겠구나하고 머뭇거리는 상황에서 ‘지금이 아니면 평생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 스스로에게 주입식 교육을 계속 했죠. ‘내가 할 수 있는 장르가 하나 늘었으니 해보자’라고요. 포크볼 장착 잘한 것 같아요. 이제 대중들이 ‘이대팔’을 부르지 않으면 무대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해요.”
이 얘기를 왜 했을까. 가수 활동을 넘어서 박상철이 이범학 인생에서 포크볼 같은 존재가 됐다는 의미부여를 하고 싶어서다. “아내의 ‘18번’도 ‘무조건’”이라는 이범학은 박상철을 포크볼 같은 옵션으로 자신의 인생 옆에 붙이고 싶다. 내 몸처럼 생각하기에 동생을 너무 잘 안다. 어디가서 사람들이 박상철을 오해하면 ‘쓸데없는 얘기’라고 말해 버린다. 내가 선택한 포크볼이 얼마나 좋은지 자신 있다.
박상철도 같은 생각이다. 형의 선한 영향력을 자신의 캐릭터로 덮고 싶다. 둘이 “서로 계속 스며들고 있다”고 하는 이유다.
이범학은 의정부에서 다시 식당을 할 계획이다. 인생 포크볼 박상철이 곁에 있어 걱정 안 된다고. 트로트 레전드 박상철이 트로트맨이 된 이범학의 또 다른 포크볼이 되어줄 기대도 크다. 박상철 역시 자신의 한결같음이 가수들의 권익 향상을 위한 일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상철이가 대한가수협회장 선거를 나간다고 했을 때 왜 굳이 힘든 길을 갈까 염려도 했었죠.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봉사를 해야 하는 자리잖아요. 회장 활동에 대해 색 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테지만, 잘 할 것이라고 확신해요. ‘박상철’은 앞, 뒤가 똑같아요. 앞에서 순진한 적하고 뒤에서 딴짓하는 친구는 절대 아닙니다. 협회의 어두운 면을 밝은 곳으로 끄집어내는 일은 정말 잘 할 것 같아요.”
“형님과 지내면서 배운 철학이 있어요. 현실적으로 해결이 가능한 것, 가능하지 않은 것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겁니다. 제가. 실현 가능한 것에 대해 집중할 겁니다. 형님이 옆에 계셔서 힘이 돼요. ‘사람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주변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뀐다’고 하는데 정말 제가 요즘 그래요.”
“사실 나도 힘들었는데 상철이 때문에 위로 많이 받았어”. 각자 서로에게 스며들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줘 고맙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보고 있자니, 함께 살아온 얘기 듣고 있자니 둘은 정말 욕심없다. 물론 돈벌이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비우고 사는 게 정말 편하다는 걸 안다. 두 사람의 ‘결’이 더 비슷해지는 것 같다.
“살아보니 알겠더라고요. 법적 싸움이든, 그냥 진흙탕 싸움이든 이겨도 내가 손해보는 느낌을 받는다고 해요, 사람들이. 싸우는 과정이 너무 힘들거든요. 저도 그래요.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래 너 먹고 떨어져라. 나는 싸우기 싫다’라고 빠지는 게 마음 편해요.”
“맞아요, 형님. 저도 거절을 못해 사기를 많이 당해봤잖아요. 돈 되돌려 받겠다고 해봐야 스트레스만 받더라고요. 정말 저도 ‘너 먹고 떨어져라’는 심정으로 포기를 많이 했었어요.”
내가 세상에 없을 때, 내 뒤를 맡아줄 사람은 너. 각자 늘 등 뒤에 있어주자.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 “내 뒤는 너가 맡아”
그래도 의미가 있는 ‘남 좋은 일’과 ‘손해보는 장사’는 계속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둘 다 같은 생각이다. 천성이 ‘베푸는 것 좋아하는데’ 어찌할 수 없다.
“우리가 좋아서 하는 ‘남 좋은 일’은 ‘보람’이 남는, 남는 장사라고 봐요.”
“형님과 함께 ‘가수들 좋은 일’ 열심히 해야겠어요.”
세련됨보다 정을 택한 ‘우리의’. 조용한 울림으로 서로를 감동시킨 ‘우리에 대한’. 같은 진심으로 인생의 한 곡을 완성하고, 특별한 콘텐츠가 될 ‘우리를 위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다. 답을 듣는다면 서로의 우정이 어떤 수준까지 이르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이규석(가수) 형이 얘기하더라고. 내가 죽기 전에 내 뒤를 누구에게 맡길 건가에 대해 고민해봤다고. 나에게 물어보면 그 사람이 박상철이 아닌가 싶어. 이범학의 후일, 길을 박상철이 맡아 챙겨준다면 기꺼이 맘놓고 세상을 떠날 수 있다고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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