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길어지는 공급망]
나프타 대란에 화학공장 생산 축소… 약통-주사기서 비닐-용기까지 품귀
정유사 가동 마지노선 50%로 줄여… 항공유 장기비축 못해 노선 줄취소
반도체 헬륨은 美서 조달 급한불 꺼
나프타 부족에 멈춰선 공장
15일 경기 포천시의 한 플라스틱 사출 업체에서 전선용 폴리염화비닐(PVC) 부품 생산 기계가 멈춰 서 있다. 원유와 나프타 수급난이 임계점에 다다르며 대기업의 설비 가동 중단 여파가 하도급 업체로까지 번지는 ‘공급망 연쇄 셧다운’ 공포가 현실화하고 있다. 포천=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최모 씨(36)는 지난 주말 딸과 함께 소아과를 찾았다가 어린이용 빈 물약통을 받지 못했다. 플라스틱의 기초 원료인 나프타 수급이 불안해지며 동네 약국에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경기 안성시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준혁 씨(31)는 “한 달 전 주문한 플라스틱 배달 용기가 오지 않아 급한 대로 종이 용기로 바꿨다”며 “사태가 장기화되면 배달 영업은 접어야 할 판”이라고 전했다.
2월 28일(현지 시간) 시작된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전쟁이 16일로 48일째에 접어들면서 에너지 핵심 공급망이 막히는 ‘핀치 포인트(pinch point·공급망에서 강하게 조여드는 병목 지점)’가 산업 전반으로 전이되고 있다. 정유, 석화, 반도체, 바이오 산업 전반은 물론이고 국민 실생활과 직결된 생필품 영역까지 충격파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도 나프타 수급을 위해 8000억 원 지원에 나서는 등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 NCC 가동률 50%대 ‘폭락’… 주사기-종량제 봉투 품귀
현재 이란 전쟁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은 ‘산업의 쌀’인 나프타다. 중동 물류 차질로 나프타 가격이 전쟁 전 대비 2배로 치솟은 데다, 4월 원료 공급이 평시(220만 t) 대비 약 18% 줄어든 180만 t에 그칠 것으로 전망되면서 수급난이 심화하고 있다. 원료 조달이 한계에 다다르자 LG화학은 전남 여수산업단지 내에 나프타분해설비(NCC) 제2공장 가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전쟁 전 80% 수준이던 국내 석유화학 공장 가동률은 50∼60% 선까지 떨어진 상태다.
병원에서 약통과 주사기, 수액 팩이 사라지고 시중에서 쓰레기 종량제 봉투와 비닐 포장지 품귀 현상이 나타나는 건 나프타 공급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다. 라면 봉지와 화장품 용기 재고도 빠르게 소진되면서 수익성 악화와 가격 인상 압박이 거세졌다. 페인트 업계 역시 원료 공급이 평소의 50% 수준으로 축소되며 생산량을 줄이고 있다.
원유 도입도 아슬아슬한 ‘노란불’이 켜졌다. 정유사들은 공장 가동률을 마지노선인 50%대까지 낮추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비축량이 적은 항공유가 가장 먼저 바닥을 드러내며 항공사들의 노선 줄취소가 이어지고 있다. 항공 물류에 의존하는 첨단 제품 수출까지 위협받고 있다.
여기에 원유 정제 찌꺼기인 아스콘(아스팔트·도로 포장재)과 탈황 공정 부산물인 ‘황’ 공급마저 급감하며 건설 업계로 충격파가 퍼졌다. 포스코이앤씨는 전국 사업장에 공문을 보내 아스콘 등 핵심 자재 수급 불안을 경고했다. 아스콘 가격 폭등에 도로 보수 공사가 중단되는 사례도 나왔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5월부터 공사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했다.
● 정부 나프타 수급에 8000억 원 투입, 공급망 ‘방화벽’
반도체 공정 필수 소재인 헬륨과 브롬 조달도 비상이다. 특히 이스라엘 수입 비중이 약 98%에 달하는 브롬 등 희귀 소재가 없으면 반도체 공장은 당장 멈춰 설 수밖에 없다. 다만, 업계가 4∼6개월가량 재고를 비축해 둔 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이 선제적으로 미국산 헬륨 장기 추가 도입에 나서며 급한 불을 끄고 있다.
사태 장기화 시 수입량의 20.4%를 중동에 의존하는 액화천연가스(LNG) 수급 불안이 촉발할 ‘전기료 폭탄’도 무서운 뇌관이다. LNG 도입 단가가 급등하면 한국전력의 발전 원가가 올라 에너지 가격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상황이 악화하자 정부는 15일 약 8000억 원 규모의 긴급 지원 대책을 내놨다. 우선 나프타 수급 안정을 위해 6744억 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올 2분기(4∼6월) 도입 물량 중 전쟁 이전보다 가격이 오른 차액의 50%를 정부가 보전해주는 방식이다. 또 미국·아프리카·유럽 등 중동 외 지역에서 원유를 들여올 때 발생하는 추가 운송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정부는 이를 통해 기업들이 약 1275억 원을 지원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당장은 단기적인 수급 차질을 최소화하는 데 집중해야겠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중장기적으로 ‘탈중동’ 공급망을 확대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며 “한국의 자원 자립도를 높이기 위한 정책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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