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임금 베트남서 생산 늘리는 중국
“韓회사 입구에 中기업들 구인광고
임금 15% 넘게 기습 인상해 데려가”
美 10% 보편관세도 부담 증가시켜
베트남 호찌민시 떤선녓 국제공항에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인 신한은행과 HS효성의 광고판이 걸려 있다. 호찌민=한재희 기자 hee@donga.com
베트남 하노이 인근에서 사업장을 운영하는 한국 기업 A사는 최근 현장 생산 인력 가운데 10%가량이 갑자기 퇴사했다. 인근 중국 업체들이 올 3월 기습적으로 임금을 올리자 베트남 근로자들이 우르르 옮겨간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A사도 최근 중국 기업 수준으로 임금을 맞췄지만, 한번 떠난 인력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A사 관계자는 “미국발 10% 보편관세 부과로 힘든데 인력까지 중국 기업에 빼앗기니 버티기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달 중순 찾아간 베트남 최대 도시 호찌민 시내에는 삼성전자, HS효성, 신한은행 등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광고판을 쉽사리 찾아볼 수 있었다. 베트남 진출 한국 기업은 크고 작은 업체를 합쳐 모두 1만 곳이 넘는다. 한국의 베트남 대상 누적 외국인직접투자(FDI)는 920억 달러(약 126조 원)에 달한다. 베트남 입장에서는 가장 많은 투자를 한 국가가 한국이다.
하지만 베트남에 생산 기지를 마련한 한국 기업들이 최근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첫 번째 요인은 중국의 공격적인 대베트남 투자다. 김형모 대한상공회의소 베트남사무소장은 “중국 업체들이 한국 회사 공장 정문에 구인광고 전단을 쌓아 놓을 정도로 인력 모집에 적극적”이라며 “베트남은 보통 7월에 임금 협상을 하는데 불시에 임금을 올려 인재를 유치하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고태연 주베트남 한국상공인연합회(코참) 회장은 “중국 업체들이 핵심 인력일 경우 한국 업체보다 10∼15% 또는 그 이상, 일반 직원일 경우 4∼5% 임금을 올려 스카우트해 간다”고 말했다.
26일 베트남 외국인투자청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한국의 베트남 대상 FDI는 70억5733만 달러였다. 중국(47억3212만 달러)과 홍콩(43억4753만 달러)을 합친 중국계 기업의 베트남 투자는 90억7965만 달러에 달했다. 2020년에는 한국(39억4911만 달러)과 중국계(중국+홍콩·44억5900만 달러)의 투자액이 엇비슷했는데 이제는 격차가 벌어졌다. 중국 기업 TCL의 TV 공장, 비야디(BYD)의 전자부품 공장, BOE의 디스플레이 공장 등이 최근 몇 년 사이 베트남에서 준공했거나 확장 공사를 하고 있다. 현지에서 만난 한 기업인은 “중국 업체들이 싱가포르에 있는 법인을 통해 베트남으로 우회 진출하는 사례도 있어 중국의 실제 베트남 투자 규모는 더 클 것”이라고 전했다.
중국 업체들이 부쩍 베트남으로 향하는 데는 미중 갈등의 영향이 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1기 정부가 들어선 2017년 이후부터 중국 기업들의 베트남 진출이 가속화됐다. 중국산 제품들에 대한 고율의 관세가 부과되기 시작하자 우회 수출처로 베트남을 ‘낙점’한 것이다. 중국 본토의 인건비가 베트남의 2.5∼3배가량에 이르는 점도 중국 기업이 베트남에 공장을 짓는 이유가 됐다.
최근에는 미국의 관세 문제까지 겹쳐 베트남 진출 한국 기업들의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미국이 베트남산 제품에 대해 46% 관세를 부과하려는 계획은 지난달 유보했지만, 10% 보편관세는 이미 적용되고 있다. LG전자는 최근 베트남 하이퐁에 있던 냉장고 생산 설비의 가동률을 낮추고 해당 물량을 멕시코 몬테레이 공장에서 만들고 있다.
LG전자는 공장이 세계 곳곳에 있어서 상황에 따라 생산량을 조절하는 이른바 ‘스윙생산’이 가능하다. 하지만 베트남에 진출한 1만여 곳의 한국 기업 중 90% 이상이 중소·중견기업이라 이렇게 대처하기 어렵다. 정준규 KOTRA 호찌민 무역관장은 “한국 기업들이 임금 인상 이외에 베트남 근로자들을 위한 맞춤 복지제도를 제공해 인재를 붙잡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며 “관세로 인한 수익성 악화는 각종 비용 절감을 추진하며 미국과 베트남 정부의 협상 결과를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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