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4월 수주량, 2021년 절반
초호황 기간 예상보다 일찍 저물어
운임 하락-中업체 추격에 위기
“친환경 선박으로 격차 벌려야”
그리스의 한 선사가 발주한 8만7000㎥급 액화석유가스(LPG) 운반선이 21일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야드 내 3독에서 건조 중이다. HD현대 제공
21일 울산 HD현대중공업 조선소 내 10개 독은 꽉 차 있었다. 조선 호황기에 접어든 2021년부터 수주한 선박들이다. 글로벌 2위 선사 머스크가 2022년 10월 발주한 6척 중 4, 5번째 선박 건조도 한창이었다.
HD현대는 2021년과 2022년 두 차례에 걸쳐 머스크로부터 메탄올 연료 컨테이너선 총 12척을 발주받았지만 그 후로 추가 수주가 주춤하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는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등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HD현대와 삼성중공업, 한화오션 등 국내 대형 조선사들은 기존에 수주한 물량으로 2028년까지는 독을 가동할 수 있지만, 그 후로는 수주량이 큰 폭으로 감소해 일감 공백에 직면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날 만난 HD현대중공업 관계자들은 시장의 기대보다 이번 조선업 슈퍼사이클(초호황)이 일찍 저물고 있다고 판단했다. 영국 조선·해운 시황 분석기관 클라크슨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4월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은 1259만 CGT(선박 건조 난이도를 고려해 환산한 톤 수)로 2021년(2244만 CGT)의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다. 이 추세라면 올해 연간 발주량이 3000만 CGT를 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발주량(7250만 CGT)에서 절반 이상이 쪼그라드는 셈이다.
이번 슈퍼사이클 지속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다는 점도 조선업계의 긴장감을 키우고 있다. 통상 과거의 조선업 초호황기는 6년 이상 이어졌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1차 슈퍼사이클은 오일쇼크가 발생한 1970년대 초까지 지속됐다. 2차 슈퍼사이클도 금융위기 이전인 2003년부터 2008년까지였다.
그러나 2021년부터 시작된 3차 슈퍼사이클은 지난해 정점을 지나 불과 4년 만에 꺾일 조짐이다. 특히 초호황기의 정점을 찍었던 지난해 발주량은 2차 슈퍼사이클의 정점이었던 2007년(9420만 CGT)에 비해 20% 이상 적다. 남철 HD현대중공업 기획지원 상무는 “2021년부터 조선소 수주량이 2차 슈퍼사이클 이후 최대 수준으로 늘긴 했지만 과거보다 피크점이 낮고 지속 기간도 상대적으로 짧아 벌써부터 위기감이 엄습한 상황”이라고 했다.
조선업계에선 짧아진 슈퍼사이클의 이유로 선박 운임을 꼽고 있다. 올해 초 2500 선이었던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하락세를 이어가다가 이달 들어 1500 선까지 추락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고강도 관세 정책으로 물동량이 위축된 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기간 발주한 선박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며 선박 공급 과잉이 벌어진 탓이다. 운임이 낮은 상황에선 선주들이 배를 추가해 선대를 확장할 필요가 없다.
업계에선 2028년 후 수주 절벽을 우려하고 있다. 클라크슨리서치는 한국의 주력 선종인 대형 LNG 운반선의 2026∼2030년 연평균 전 세계 발주량을 49척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난해 발주량이 77척인 것을 감안하면 크게 줄어드는 셈이다. 대형 컨테이너선 발주량도 지난해 82척에서 해당 기간 43척으로 줄어들 것으로 분석됐다.
● 추격하는 中조선… “기술 격차 벌려 불황 대비해야”
중국의 조선업 굴기도 국내 조선업계에는 위기 요인이다. HD현대 경영진은 중국 조선업 분석을 위해 지난해 9월 현지를 방문했다. HD현대는 답사 보고서를 통해 중국 조선업의 인건비가 낮고 직영과 협력업체의 혼재 생산 등으로 생산성이 상당히 높아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중국 조선사들은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해 대형화하면서 국내 조선사와의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히고 있다. 실제로 중국 1, 2위 조선 기업인 중국선박공업그룹(CSSC)과 중국선박중공업그룹(CSIC)이 연내 합병을 완료할 경우 자산 규모 75조 원, 세계 수주량의 3분의 1을 점유하게 된다.
국내 조선사들은 메탄올, 암모니아 연료 추진선 등 친환경 선박 개발을 통해 중국과의 기술 격차를 벌려 조선업 불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신형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올해 수주가 급감하며 조선 호황이 시장 기대보다 짧게 마무리될 가능성이 있다”며 “정부는 환경 규제를 정비해 새로운 친환경 선박 개발을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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