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세기, 강력한 육군을 내세워 제국을 꿈꾸던 로마는 해상 강국 카르타고와 충돌하게 된다. 제대로 된 전함 한 척 없던 로마가 막강한 해군력의 카르타고를 이긴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로마는 포기하지 않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먼저 카르타고 전함 한 척을 분해해 복제에 성공했고, 총력을 다해 몇 달 만에 선원들을 훈련시켰다. 여기에 더해 로마군은 ‘코르부스’라는 장치를 고안해 냈다. 날카로운 송곳이 달린 다리 형태의 구조물을 배와 배 사이에 놓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해전은 더 이상 전함 간의 전투가 아닌 육지전이 된다. 발상의 전환으로 전쟁의 판도를 바꿔버린 로마는 마침내 지중해의 제해권을 갖는 데 성공한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또 다른 전쟁터에 서 있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로봇 기술, 그중에서도 인공지능(AI) 휴머노이드 로봇을 향한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미중뿐 아니라 전 세계가 AI 로봇 기술 선점을 위해 천문학적 투자를 감행하고 있고, 세계 시장 규모는 10년간 25배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테슬라와 피규어 AI가 3∼5년 이내 휴머노이드 로봇을 본격 보급하겠다고 발표하고, 중국은 로봇 산업에 195조 원을 투자한다는데,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사실 20년 전만 해도 한국은 로봇 선도국이었다. 1980년대 대우중공업이 산업용 로봇 ‘노바-10’을 만들어 미국에 수출하는 등 한국은 비교적 일찍부터 로봇 기술을 준비해 왔다. 오늘날 미국과 어깨를 겨루고 있는 중국은 당시에는 관련 논문도 몇 편 없던 로봇 불모지에 가까웠다. 2005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마루’와 ‘아라’를,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휴보’를 개발했고, 2015년 미 고등방위연구계획국(DARPA)이 주최한 로봇 경연대회에서 ‘휴보’가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의 기술력이 전 세계에 입증된 바 있다.
출발은 나쁘지 않았는데, 오늘에 이르러서는 어느새 미국과 중국을 쫓아가는 신세가 된 것이 안타깝다. 우리가 뒤처진 이유는 단순히 기술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장기적 안목의 일관되고 지속적인 투자와 정부-민간 간의 유기적 협력의 부재였다. 선도국들은 장기 계획과 막대한 자본, 정책 조합을 통해 AI 휴머노이드 산업 전반을 하나의 생태계로 만들어가고 있다. 반면 우리는 그간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왔음에도 확실한 선도적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 이유를 냉정히 돌아보아야겠다.
지금이 AI를 활용한 첨단 로봇 기술 패권을 다시 가져올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AI 휴머노이드 시장은 최근에서야 성장 궤도에 진입한 시장으로, 아직 글로벌 절대 강자가 없는 과도기에 있다.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각국 휴머노이드 로봇의 현란한 움직임들은 대부분 학습을 통해 미리 프로그래밍된 것이다. 스스로 작업을 인지해 수행하고 우리 일상에서 공존하는 진정한 ‘자율형 휴머노이드’ 기술은 이제 막 도전을 시작한 상태다. 바로 지금이 선점의 기회이자 전략적 돌파구가 될 수 있는 마지막 결정적 순간인 것이다. 이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우리는 영원히 추격자로 남게 될 가능성이 크다.
글로벌 기술 패권 확보를 위해서는 공공과 민간이 전방위로 협력해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로봇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와 AI, 데이터, 배터리 기술까지 통합 개발하는 패키지형 원천기술 개발이다. 카르타고와의 일전을 앞두고, 해상전을 백병전으로 만들어버린 로마의 전략에서 지혜를 빌려 오자. 신속한 전략 설정과 실행,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국가적 지원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