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기회로 바꾼 도전… “험지 비즈니스는 월드클래스”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7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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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기업을 향해]영산그룹

전주공장 2층 전기버스 베어섀시 생산하는 모습(왼쪽)과 영산글로넷 전주공장 전경. 영산그룹 제공


유럽의 심장부 오스트리아 빈에서 시작된 한 한국인의 도전이 26년 만에 전 세계 17개국을 아우르는 글로벌 기업으로 꽃피웠다. 영산그룹 박종범 회장의 이야기는 단순한 기업 성공담을 넘어 한국인의 저력과 불굴의 정신력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서사다.

IMF 위기서 찾은 새로운 기회, 동유럽 개척의 시작

1996년 가을 쌀쌀한 빈공항에 내린 한 젊은 한국인의 발걸음은 그 자신도 모르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열고 있었다. 당시 국내 굴지 자동차회사의 상사 오스트리아 법인장으로 발령받은 박 회장은 이곳에서의 생활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1997년 말 한국을 뒤흔든 IMF 외환위기는 박 회장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하루아침에 본사가 다른 회사에 인수됐고 그는 인생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그때는 진짜 막막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퇴직은 확실했고 여기 남자니 앞길이 보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는 마음속 깊숙이 꿈틀거리는 도전 정신을 따라 오스트리아 잔류를 결심했다.

1999년 자본금 10만 달러로 영산그룹을 설립하면서 ‘기업가 박종범’의 여정이 시작됐다. 유럽 사회의 높은 진입 장벽을 체감한 그는 전략을 바꿨다. 서유럽 대신 동유럽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당시 러시아와 CIS(독립국가연합) 국가들이 공산주의 체제에서 벗어나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과도기였기 때문이다.

그 시절 박 회장의 삶은 혹독했다. 연간 200일 이상 동유럽 곳곳을 누비며 하루 평균 2∼3시간의 수면으로 버텨냈다. 인종차별과 언어 장벽, 복잡한 현지 관료제도와 맞서 싸워야 했다.

“어차피 뒤로 갈 곳도 없었으니까요. 앞으로 가는 수밖에는….”

현장과 신용, 정도를 따르는 경영 철학

박 회장의 첫 사업은 우크라이나 사탕 공장에 한국산 포장재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월 거래액이 수십만 달러에 불과한 작은 사업이었지만 이것이 거대한 영산그룹의 첫 디딤돌이 됐다.

“1999년 창사 이래 저의 변치 않는 경영 철학은 현장의 중요성과 고객에 대한 신용입니다.” 박 회장의 경영 원칙은 명확하다. “경영 환경은 단 한 번도 일관된 해법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결국 현장만이 가장 적합한 경영 솔루션을 제시할 수 있어요.”

그에게 현장은 단순한 업무 공간이 아니라 진리를 발견하는 성전과도 같다. 그는 지금도 국내에 있기보다는 해외 각국을 출장 다니며 직접 현장을 확인한다.

박 회장이 강조하는 또 다른 핵심 가치는 고객에 대한 신용이다. “비즈니스는 손익을 우선한 고객과의 일시적 관계가 아니라 믿음에 기반한 지속성이 성장과 유지의 관건입니다.” 그는 일시적 손해와 이익에 집착해 고객에 대한 신용을 무너뜨리면 결코 그 기업의 항구적 지속성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나는 고객에 대한 신용은 믿음에 더해 진심으로 고객을 적극적으로 위하는 자세까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영산그룹이 26년간 지켜온 변치 않는 신념이다.

2004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자동차 관련 사업에 뛰어들었다. 한국 자동차를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는 중계무역으로 시작해 점차 자동차 부품 제조, 조립 공장 건설로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특히 자금력이 부족한 현지 대리점들을 지원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금융기관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해 신용장을 개설하는 혁신적인 금융 솔루션을 개발했다.

가장 큰 타격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었다. 하루아침에 5개 공장이 가동을 멈췄다. 하지만 박 회장은 굴복하지 않았다. “위기는 항상 있었어요. 그때마다 더 강해졌고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됐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영산그룹만의 독특한 경쟁력이 됐어요.”

험지에서 쌓은 월드클래스 노하우

현재 영산그룹은 전 세계 17개국 22개 법인을 운영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전체 임직원 약 1500명이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 3개 대륙에서 자동차 부품 제조, 플랜트 건설, 친환경 에너지 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영산그룹의 진정한 강점은 남들이 꺼리는 험난한 지역에서 축적한 독보적 노하우다. 박 회장은 “영산은 비록 최첨단 반도체나 AI 제조 능력은 약하지만 다양한 환경과 각종 위험에 노출된 전 세계 험지 국가에 유통, 물류, 금융 및 현지 투자를 통한 심층 노하우를 누적해온 회사”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글로벌 시장에서는 첨단 제품이 개발되고 아무리 우수한 제조 기술이 있어도 정작 다양한 환경의 판매 및 영업 현장에서는 여전히 공급과 수요의 마찰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A 국가에 적합한 투자나 사업 모델이 바로 옆 나라인 B 국가에는 완전히 부적격한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복잡한 환경에서 영산그룹이 자부하는 것은 유통, 금융, 현지 법규 및 수요자 트렌드 분석 등 무형의 노하우다. “어려운 지역과 복잡한 거래 환경에서만 가능한 우리의 기술적 노하우는 감히 월드클래스라고 자부할 수 있다”고 박 회장은 강조했다.

실전에서 검증된 전문성, 친환경 경영 재도약

150만 대 이상의 차량 SKD(반조립) 포장과 운송을 통해 축적된 러시아와 CIS 지역 해상, 육상, 철도 수송의 다양한 물류 환경에 대한 경험은 국내 타 업체에도 공유돼 운송상 발생 가능한 제품의 파손을 방지할 수 있었다.

실제로 영산의 상당한 해외 투자 지역이 현재 분규와 제재가 이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산은 꾸준히 성장 발전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전북 전주공장이 허브 역할을 한다. 상용차 부문 공식 특장업체로서 2층 전기버스, 전기버스 시트 및 외관 설치, 수소 버스 정비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부산공장은 하루 100대, 월 2000대 규모의 반조립 키트 생산을, 인도공장은 자동차 공장의 적시 생산 물류를 책임진다.

유럽에서는 슬로바키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칼리닌그라드에서 차량 플라스틱 부품 제조와 자동차 시트 조립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또 수소 버스 조립, 세르비아 병원 위험물 및 산업 폐기물 처리 설비 공장 설립 관련 노하우와 기술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나가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약품 유통 시스템 구축, 특장차 제조 등 친환경적인 사업 진출을 진행 중이다.

“영산이 초기에는 자동차 등 ‘굴뚝 사업’으로 기반을 확충했으나 시대적 요구인 지구환경을 위한 대응은 새로운 도전과 수익 창출의 영역으로 생각합니다.” 박 회장의 ESG 경영 철학이다.

영산은 국내 유수 전기차 충전기 업체와 함께 세계 진출을 통해 재도약을 모색하고 있으며 배터리 화재 문제 해결을 위한 이륜차용 소형 배터리 방염 시스템을 관련 업체와 함께 연구개발하고 있다. 동유럽과 러시아 CIS 지역에 배터리 리사이클링 및 배터리 재제조 사업도 적극 추진 중이다.

자동차 생산 분야에서는 국내 2층 전기버스 섀시 생산 및 납품, 유럽 및 인도네시아 수소 버스 생산 및 납품 등을 통해 친환경 모빌리티 분야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 외교 통한 사회 공헌… 월드옥타 회장의 리더십

박종범 회장이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하는 모습.
박 회장의 진정한 자부심은 사업 성공보다 한국 문화 전파에 있다. 그는 오스트리아 한인연합회장, 유럽 한인총연합회장, 민주평통 유럽중동아프리카 지역 담당 부회장을 역임하며 유럽 한인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그 결실이 바로 2012년 건립한 오스트리아 한인문화회관이다. 이는 유럽 최초 민간에 의해 설립된 한인 문화시설로 현지 유형문화재 건물을 내부 개조해 건립했다.

“한인문화회관을 짓기 위해 많은 부분을 제가 후원했습니다.” 박 회장의 이 말에는 조국에 대한 자부심과 문화 전파에 대한 사명감이 담겨 있다. 2022년에는 ‘한국 시인의 정원’을 조성했다. 동포 설문을 통해 김소월, 윤동주, 한용운, 정지용, 조지훈 등 5명의 한국 대표 시인을 선정해 문화와 예술, 평화와 화합을 사랑하는 한국인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꾸몄다.

영산그룹은 ‘WCN’이라는 문화교류사업 법인을 설립해 매년 빈 소년 합창단 내한 공연, 빈 필하모닉 및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한국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서울시향 및 KBS 교향악단, 대전 연정국악단, 경기 전통 국악단 등의 유럽 공연을 유치해 한국과 유럽의 문화 교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3월 박 회장의 부인인 WCN 송효숙 대표는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명예황금훈장을 수훈했다.

한편 박 회장은 2023년 세계한인경제무역협회(월드옥타) 제22대 회장에 선출됐다. 1981년 설립된 월드옥타 42년 역사상 유럽에서 회장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전 세계 71개국 151개 지부, 7000명의 해외 한인 CEO와 2200명의 차세대 기업가를 이끄는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됐다.

올해 4월 안동에서 열린 ‘코리아 비즈니스 엑스포’에서는 해외 51개국 한인 경제인들이 1억5000만 원의 산불 피해 복구 성금을 기부했다. 오는 10월에는 인천 송도에서 대규모 박람회가 예정돼 있다.

박 회장은 “코리아 비즈니스 엑스포는 해외 한인 경제인들과 해외 바이어들이 참가해 국내 중소기업들의 해외 수출 판로 개척을 위한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제대로 된 스타트업 기업이 나오면 기술 지원을 해주고 자본을 투자해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명실상부 국내 중소기업과 해외 한인 기업들 간의 협력 창구”라고 설명했다.

지난 15일 월드옥타 회장 자격으로 전남대 용봉포럼에서 ‘세계를 향한 도전, 미래를 위한 투자, 사회에 대한 공헌’을 주제로 특별 강연을 펼친 박 회장은 “유럽의 심장부에서, 전 세계를 무대로, 한국인의 정신으로 경영되는 영업 활동을 통해 모두로부터 존경받는 회사를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강연에서 자신의 경영 철학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희생과 봉사의 신앙적 삶, 둘째, 고향을 생각하는 인간적 삶으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 셋째, 문화와 예술을 함께하는 미를 추구하는 삶이다.

박 회장은 “앞으로도 한국인의 정신으로 세계 무대에서 당당하게 경쟁하며 모두로부터 존경받는 글로벌 기업을 만들어가겠다”고 다짐했다.

“현장에 답이 있고, 신뢰는 진정성에서 나옵니다”

박종범 영산그룹 회장 인터뷰
박종범 영산그룹 회장
박종범 영산그룹 회장
박종범 영산그룹 회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25년간의 험난한 여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경영 철학과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경제적 어려움이 아니라 정체성의 혼란이었습니다.” 박 회장은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회상했다.

법인장이라는 안정된 지위를 잃고 홀로 서야 했던 순간 그를 지탱해준 것은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이었다. “제가 실패하면 한국 사람 전체가 실패자로 평가받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 회장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현장의 중요성이다. “현장을 직접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지금도 1년에 200일 넘게 출장을 다닙니다. 현장에 답이 있고 현장에서 신뢰가 만들어지죠.” 그는 경영 환경이 단 한 번도 일관된 해법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현장만이 가장 적절한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고객에 대한 그의 철학도 남달랐다. “비즈니스는 일회성 거래가 아닙니다. 믿음에 기반한 지속가능한 관계가 진짜 자산이죠. 차가운 이해관계가 아닌 진심으로 고객을 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영산그룹의 독특한 경쟁력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드러냈다. “우리는 최첨단 기술은 없지만 남들이 가기 꺼리는 어려운 지역에서 쌓은 무형의 노하우는 월드클래스라고 자부합니다.” 150만 대 이상의 차량 포장과 운송 경험을 통해 축적한 물류 전문성이 대표적 사례다.

부인 송효숙 WCN 대표와의 동반자적 관계도 인상적이다.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영산그룹도, 문화 사업도 없었을 것”이라며 “특히 문화 교류 분야에서는 제가 사업가라면 아내는 진정한 문화 전도사”라고 표현했다.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에 대한 의지도 밝혔다. “작은 규모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와 공동체 의식을 기반으로 사원 주주제를 조심스럽게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 제도가 성공적으로 시행된다면 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더욱 투명하고 책임 있는 경영 기반을 확립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후계자 양성과 미래 비전도 구체적이다. 장남 박건영 상무는 빈공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빈 본사에서 법인장으로 경영 수업을 받고 있다. 차남 박건호 씨는 영국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영국과 미국 변호사로서 싱가포르에서 활동하며 법무 분야의 전문성을 키우고 있다.

박 회장은 월드옥타 회장으로서의 포부도 밝혔다. “해외에 나가 있는 한인 경제인들이 단순히 개인의 성공에 그치지 않고 한국 경제 발전과 한국 문화 확산에 기여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박 회장은 “앞으로도 한국인의 정신으로 세계 무대에서 당당하게 경쟁하겠다”며 “내가 개척한 길이 후배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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