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10G올해 패션계를 뒤흔든 키워드는 바로 ‘해적코어(Pirate-core)’다. 나부끼는 셔츠 자락과 허리를 질끈 동여맨 가죽 벨트, 묵직한 장신구까지.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옷차림이 패션 신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쏟아진 ‘코어’ 트렌드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존재감으로 패션계를 장악 중이다.
emilio pucci
@yun.e.jae해적코어는 17~18세기 카리브해 해적들의 복식에서 유래한 스타일이다. 실존 인물인 에드워드 티치가 그러했듯, 러플 블라우스와 베스트, 벌룬 팬츠, 슬라우치 부츠, 삼각 모자, 반다나 등이 대표 아이템으로 꼽힌다. 오늘날의 해적 스타일은 단순한 코스튬을 넘어선다. 망망대해 속 끝없이 펼쳐진 모험은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해적은 시대가 자유와 불복종을 요구할 때마다 패션 역사 속으로 소환돼왔다. 특히 패션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해적 스타일을 패션으로 끌어온 선구자다. 1981년 런던패션위크 데뷔작 ‘파이럿(Pirate)’ 컬렉션에서 여성의 억눌린 권위에 저항하며 이를 해적 판타지로 풀어냈다. 장 폴 고티에 역시 2003년과 2008년, 해적 콘셉트의 컬렉션을 연이어 선보였다. 파이프 담배까지 등장시킨 파격적인 연출로 젠더 규범에 도전하는 도발적인 스타일을 완성했다. 안나 수이는 2007년 컬렉션에서 금장 디테일을 더한 보헤미안풍 해적 룩으로 해적의 황금기를 재현했고, 존 갈리아노는 2011 S/S 컬렉션에서 잭 스패로를 연상케 하는 룩으로 시대의 반항 정신을 되살렸다.
한층 정제된 해적코어 인기
@yezyizhere2025 S/S 컬렉션에선 한층 정제된 해적코어가 눈에 띈다. 마치 ‘도시의 해적단’을 보는 듯했다. 해적 특유의 반항적인 코드는 유지하되, 고급스럽고 절제된 감각으로 재해석한 것이 특징이다. 알렉산더맥퀸은 해군 제복에서 파생된 재킷과 베스트에 정교한 러플 장식을 더해 우아한 항해자의 이미지를 완성했고, 조르지오아르마니는 미니멀한 재킷과 벌룬 팬츠, 태슬 벨트, 실크 스카프로 해적 무드를 은은하게 담아냈다. 신진 브랜드들도 이 흐름에 가세했다. 독일의 SF10G는 베스트를 덧댄 톱과 슬릿 스커트에 타투 프린트와 스모키 메이크업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고, 멕시코의 올모스앤플로레스는 레오퍼드 러플 블라우스와 빈티지 카고 팬츠, 레게 헤어로 야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maria_bernad다가올 F/W 시즌에도 해적코어는 이어질 전망이다. 대표적인 앤드뮐미스터는 러플 블라우스와 가죽 베스트, 맥시스커트에 챙 넓은 모자를 더해 우아하면서도 모던한 해적 룩을 선보였다. 크리스찬디올 역시 러플 셔츠에 가죽 코르셋과 재킷을 매치해 고전적인 우아함이 깃든 귀족풍 해적 룩을 완성했다. 그런가 하면 랄프로렌은 클래식한 슈트에 선원복 디테일을 가미해 절제된 반항미를 표현했다. 보다 실용적인 스타일은 블루마린과 이자벨마랑에서 찾을 수 있다. 블루마린은 가죽 스트랩이 돋보이는 화이트 블라우스에 컷아웃 가죽 팬츠를 매치해 강인한 인상을 남겼고, 이자벨마랑은 셔츠와 데님 팬츠에 베스트를 덧입고, 실버 체인과 주얼리를 레이어드해 Y2K 무드의 해적 룩을 제안했다.
@charli_xcx셀럽들도 해적코어 트렌드에 합류했다. 싱어송라이터 찰리 XCX는 깃털 장식의 재킷과 스커트에 니하이 부츠를 더한 블랙 룩으로 고혹적인 해적 무드를 연출했고, 마리아 버나드는 화이트 재킷에 블랙 버킷 해트를 써 도시의 잭 스패로를 연상케 했다. 과감한 믹스 매치도 좋지만, 해적 룩이라고 해서 꼭 대담할 필요는 없다. 오버사이즈 셔츠에 굵은 벨트를 매거나 빈티지 주얼리를 레이어드하고,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올 블랙 룩에 두건을 둘러 해적 무드를 즐긴 모델 테일러 힐과 윤이재처럼 말이다.
해적코어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트렌드가 아니다. 사회의 틀을 벗어나 스스로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질서 정연한 시대, 거침없이 나아가는 해적코어는 우리에게 다시금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지금, 눈앞에 펼쳐진 스타일의 바다를 건널 준비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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