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포퓰리즘의 원조 헝가리 오르반, 왕조의 균열이 시작됐다[딥다이브]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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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민’을 외치는 민족주의적 포퓰리스트. 요즘 유럽에서 급부상 중인 정치세력이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도 맥이 닿아있고요. 그 원조이자 가장 성공한 모델은 바로 이 사람일 겁니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

선거 독재. 2010년 집권 후 입법·사법·언론을 모두 장악하며 승승장구해 온 오르반 정권을 일컫는 용어이죠. 지난 네 차례 선거에서 연속으로 압승한 그를 막을 자는 없어 보였는데요. 하지만 그 공고한 성에 금이 가고 있습니다. 2026년 총선이 오르반 시대를 끝낼지 모른다는 관측까지 나오죠. 흔들리는 헝가리 오르반 정권을 들여다보겠습니다.

EU의 현직 국가 지도자 중 최장기 집권자인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 하지만 이제 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AP 뉴시스
*이 기사는 8월 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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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경제를 구하다
한때 오르반 총리는 헝가리 경제를 구한 영웅이었습니다. 빅토르 오르반의 피데스당(Fidesz)이 압도적 총선 승리로 집권한 2010년, 헝가리 경제는 금융위기 수렁에 빠져있었죠. 헝가리 민족주의를 앞세운 오르반은 ‘경제 주권론’을 주창합니다. 구제금융을 제공한 IMF의 가혹한 구조조정 요구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비정통적인 경제정책을 펼쳐나갔죠.

은행·통신·에너지 등 외국자본이 장악한 기업에 막대한 ‘특별세’를 물려 구멍 난 재정을 채웠고요. 사적연금을 강제로 국유화해 국가 기금을 늘립니다. 동시에 성장을 촉진한다며 소득세 누진세를 없애고 단일세율(현 15%)로 바꾸는가 하면, 대대적인 공공사업을 벌여 일자리를 확충했죠.

이런 이단적인 경제정책이라니. 다들 회의적으로 바라봤는데요. 웬걸, 이 ‘오르반노믹스’가 들어맞았습니다. 헝가리 경제는 성장을 회복했고 실업률이 하락했고, 2013년 IMF 체제 조기졸업에 성공했죠. 전 세계의 찬사가 쏟아집니다.

오르반은 헝가리 특유의 강한 민족주의를 이용해 정치세력을 공고히했다. 그는 ‘브뤼셀’이라 칭하는 EU 집행부와는 각을 세우고 대신 친트럼프, 친러시아 행보를 이어간다. AP 뉴시스
그리고 이 초기 시기, 오르반은 제도 개혁에 나섭니다. 장기 집권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 둔 건데요.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거대 여당의 힘과 높은 국민 지지율 덕분에 이 과정은 합법적이고 평화롭게 이뤄졌죠.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사법부 장악= 판·검사 정년을 70세에서 62세로 낮춰 대거 물갈이합니다. 법원행정처장은 의회가 임명하게 바꿔, 의회 영향력을 키웠고요. 헌법재판관 정원은 11명에서 15명으로 늘려, 친정부 성향으로 채웠죠.

선거법 개정=국회의원 정원을 386명에서 199명으로 줄이고, 결선투표가 따로 없는 ‘단일 투표제’를 도입합니다. 거대 정당엔 유리하고 분열된 소수 야당엔 불리하게 제도를 바꾼 거죠. 선거구 역시 여당에 유리하게 조정됩니다.

언론 장악=미디어법을 개정해 증오 조장을 이유로 언론에 거액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듭니다. 언론 규제기관은 친여 성향 인사로 채웠고요. 공영방송사는 통폐합됐고, 직원은 대거 해고 후 물갈이됩니다.

힘을 잃은 오르반의 마법
왜 헝가리가 ‘선거 독재 국가’로 분류되는지 아시겠나요. 물론 헝가리는 러시아 같은 경찰국가는 아닙니다. 반대파를 가두거나 구타하는 그런 일은 없죠. 그런데도 독재자로 불리는 오르반 총리가 선거에서 계속 승리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국민이 그를 지지했기 때문입니다. 그 원동력이 되어온 건 경제성장, 그리고 복지정책이었죠.

오르반은 경제성장을 위해선 제조업을 유치해서 고용을 늘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헝가리는 2017년 법인세를 무려 절반 이하로 깎아주는(19→9%) 파격적인 정책을 내놨고요. 동시에 각종 보조금까지 퍼주면서 해외 기업, 특히 자동차 산업을 유치에 열을 올립니다. 한국과 중국 배터리 기업들도 헝가리에 공장을 지었죠. 헝가리는 단숨에 유럽 전기차 제조의 허브로 떠올랐고요. 덕분에 고용시장은 노동력 부족을 걱정해야 할 정도가 됩니다(실업률 2010년 11.4%→현재 4.3%).

헝가리는 세계에서 가장 관대한 출산장려정책을 펼치는 나라입니다. 이민을 막으면서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선 출산율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죠. 신혼부부에 초저금리 주택자금 대출을 해주고, 첫 아이를 낳으면 이자, 둘째를 낳으면 원금 일부, 셋째는 원금 전액을 탕감해 주는 정책. 한때 한국에서도 따라 하잔 얘기가 나왔는데요. 이뿐 아니라, 애가 넷인 여성에겐 아예 평생 소득세(15%)를 면제해 주기도 합니다. 2011년 1.23명으로 떨어졌던 헝가리 출산율은 2020년엔 1.59명까지 올랐습니다.

부다페스트 중심가의 모습. 게티이미지
부다페스트 중심가의 모습. 게티이미지
그럼 대단히 성공적인 것 아니냐고요? 한동안은 그런 줄로 알았습니다. 헝가리를 해외기업 유치와 출산율 반등의 모범사례로 많이 꼽았었죠. 그런데 2022년 말, 잘나가던 헝가리 경제가 역성장을 기록하며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고금리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 경제 기류가 달라졌기 때문이죠. 정부가 기업과 가계에 지원금을 쏟아붓는 성장 방식이 한계에 부딪힌 겁니다.

늘어난 재정적자, 높아진 국가부채 비율은 통화가치(포린트화)를 끌어내렸고요. 여기에 유가 급등까지 겹치면서 식품 물가가 미친 듯이 뜁니다(2023년 초 무려 연 45% 상승). 오르반 정부는 물가를 잡겠다며 ‘가격 상한제’를 실시했지만, 마트 매대에서 계란과 우유가 사라지는 초유의 상황이 펼쳐졌죠.

물가가 이제야 조금 잡히나 싶던 2024년. 이번엔 ‘전기차 캐즘’이 닥칩니다. 헝가리 수출을 떠받치는 자동차 산업이 직격탄을 맞게 됐죠.

그리고 놀라운 사실. 그렇게 돈을 쏟아부었건만, 반짝 오르는 듯했던 출산율이 다시 고꾸라집니다. 2024년 출산율은 1.38명(추산). 출산 장려 정책이 애를 더 많이 낳게 만든 게 아니라, 출산 시기를 앞당기게 했을 뿐이었던 겁니다.

돌아선 내부자가 들춰낸 비밀
2025년, 헝가리 경제는 성장을 거의 멈췄습니다(성장률 1% 전망). 재정적자는 점점 더 불어나고 있고요(GDP의 4.9%). 그런데도 물가가 여전히 불안하기 때문에(6월 물가상승률 4.6%)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매우 높게 유지 중입니다(6.50%). 먹고 살기 힘들다는 유권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데요.

약 10개월 뒤인 2026년 6월 총선을 앞둔 오르반 정권을 더욱 초조하게 만드는 게 있습니다. 이전엔 본 적 없는 강력한 야당 세력의 등장이죠.

그동안 헝가리 야당은 분열됐고 무능했습니다. 지난 십수 년 동안 오르반에 맞설 만한 야당 리더는 보이지 않았죠. 그런데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있으니. 티서(Tisza)당 대표 페테르 머저르입니다.

집권당의 핵심 내부자에서 강력한 야당 대표로 변신한 페테르 머저르(가운데) 티서당 대표. 현재 머저르 개인에 대한 지지율은 매우 높지만, 전국적 조직력이 약한 티서당이 총선에서 얼마나 선전할 수 있을지는 두고봐야 한다. 티서당 홈페이지
머저르는 오르반 정권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피데스당의 핵심 내부자였죠. 오르반의 정치적 후계자로 꼽혔던 전 법무부 장관의 전 남편(2023년 이혼)이기도 하고요. 2024년 2월 헝가리 전 국민을 경악케 한 ‘소아성애자 사면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당시 헝가리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머저르의 전 부인)이 사임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는데요. 이를 계기로 머저르는 반정부 운동가로 180도 변신합니다. 오르반 정권을 잘 아는 그는 정권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폭로하기 시작했죠. 바로 측근의 부패입니다.

수만개의 ‘좋아요’를 받은 머저르의 SNS 글을 하나 볼까요.
“친애하는 이슈트반, 당신은 정말 재능 있는 사람입니다. 37세 나이에 1000억 포린트(약 4000억원), 여러 호텔, 은행, 펀드, 과거 가치 있던 국유 부동산, 바베러스(헝가리 운송회사), 베오그라드 오피스 시장의 절반, 아직 건설되지 않은 부다페스트 오피스 빌딩(이미 국유기업이 임대계약을 맺은)까지 소유하고 있습니다.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국가 대출과 보조금을 받았나요? 비결이 뭐예요? 당신의 목표는 뭔가요? 10년 후 긴 숫자선 끝에 0이 하나 더 생긴다면, 그걸로 충분할까요?”

여기서 언급된 이슈트반 티보르츠는 오르반 총리의 사위입니다. 정부 대출과 보조금이 오르반 일가의 막대한 부를 형성하는 데 쓰이고 있다는 폭로였죠.

오르반 총리와 그의 사위 이슈트반 티보르츠. 오르반 총리가 본인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이다.
오르반 총리와 그의 사위 이슈트반 티보르츠. 오르반 총리가 본인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알았던, 하지만 쉽게 건드릴 순 없었던 오르반 측근의 부패상에 대한 비판이 봇물 터진 듯 쏟아져 나옵니다. 오르반의 고향 친구인 뢰린츠 메사로시의 사례는 가장 극적이죠. 고향에서 작은 가스설비 회사를 운영했던 메사로시는 2010년 오르반 정권 출범 이후 헝가리 최고 재벌로 급성장합니다. 그의 건설회사가 국가가 발주한 대규모 인프라 사업(원자력 발전소, 철도 건설 등) 입찰을 줄줄이 따냈기 때문이죠. 그는 자신의 성공이 “신과 행운, 그리고 빅토르 오르반” 덕분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르반 총리의 아버지, 두 동생, 기숙사 룸메이트, 사위의 친구, 친구의 친구 등등. 지난 15년 동안 막대한 부를 축적한 권력자 측근들 사례가 연일 폭로됩니다.

‘반부패’를 내세운 페테르 머저르는 단숨에 열광적인 지지층을 끌어모읍니다. 그가 이끈 티서당은 202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제2당(21석 중 7석 확보)으로 올라서는 돌풍을 일으켰죠. 지지율은 갈수록 높아지는 상황. 최근 여론조사에선 티서당 지지율이 집권여당 피데스당보다 5~10% 포인트 앞섭니다.

불안한 여당은 이미 지난해 말 또다시 선거구를 개편해 유리한 판을 짜두긴 했는데요. 이런 강력한 도전자의 등장은 처음이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이래도 안 뽑아줄래
급해진 오르반 정부. 선거 승리를 위해 ‘필살기’를 마구 쏟아내고 있습니다.

①어머니를 위한 세금 감면=헝가리는 2020년부터 네 자녀 이상인 여성에게 소득세를 평생 면제해 주는데요. 2025년 10월부턴 세 자녀, 2026년 1월부터는 두 자녀를 둔 여성도 소득세가 면제됩니다. 약 100만명이 추가로 혜택을 받게 되죠.

②가족을 위한 세금 감면 확대=헝가리는 자녀 수에 따라 매달 내는 개인 소득세에서 일정 금액을 깎아주는데요. 7월 1일부터 이 혜택을 50% 늘렸습니다. 자녀 1명이면 월 약 6만원, 2명이면 24만원, 3명이면 60만원 세금을 깎아주는 거죠. 이 감면 금액은 내년엔 더 늘어납니다.

6월 28일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프라이드 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이 오르반 정권에 반대한다는 팻말을 들고 있다. 오르반 정부는 법까지 바꾸며 이 성소수자 관련 행진을 금지했지만, 오히려 그게 반대 여론을 부추겼고 올해 프라이드 행진은 역대 최대 참여자를 기록했다. AP 뉴시스
③은퇴자를 위한 부가가치세 환급=올해 10월부터 연금 수급자를 위한 부가가치세 환급 제도가 새롭게 도입됩니다. 은퇴자가 유제품·채소·과일을 구매할 때 환급용 카드를 내면, 부가가치세(27%)를 계산해 계좌로 환급해 준다는데요. 1인당 월 6만원까지 환급받을 수 있게 될 겁니다.

④식료품 가격 상한제=올해 초 식료품 가격이 다시 들썩이자, 헝가리 정부가 또 도입한 제도입니다. 계란·요구르트·식용유 등 30가지 식품군에 대해선 유통업체 마진을 원가의 10%로 제한했죠. 유통업체는 10% 마진율로는 팔면 팔수록 손해라며 울상입니다. 올해 8월 말까지인 가격 상한제가 연장될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

포퓰리즘이란 이런 거로구나, 실감할 수 있으시죠. 사실 지금 헝가리 경제 상황이 이럴 때가 아닙니다. 이러다 재정적자가 더 늘어나면 자칫 높지도 않은 국가 신용등급(S&P 기준 BBB-)이 더 떨어질 수 있거든요. 그럼 국가 경제엔 진짜 큰일입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정권엔 내년 총선 승리가 발등의 불이죠. 만약 정권이 교체되기라도 하면 줄줄이 부패 혐의로 감옥에 갈 판이니까요. 최근 피데스당은 ‘머저르는 우크라이나의 꼭두각시’라는 식의 비방전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민족주의적 선동에 능한 EU 최장기 집권 지도자의 노련함이냐, ‘부패척결’ 과 ‘헝가리 재건’을 외치는 젊은 야당 리더의 패기냐. 내년 선거 결과는 아직 예측불가인데요. 모처럼 헝가리 선거판이 재미있어지는 중입니다. By.딥다이브

오르반 총리에 대한 인물평을 모아보면 “똑똑하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재주가 있다는 평도 있고요. 다만 문제는 그 뛰어난 능력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측근의 부를 증식하는 데 주로 이용한 것 같다는 점이죠.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유럽 극우 포퓰리즘 세력의 롤모델, 헝가리 오르반 총리. 2010년부터 집권한 그는 한동안 헝가리 경제 성장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선거 독재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하지만 막대한 국가 보조금과 대출을 동원하는 성장 방식은 몇년 전부터 한계에 부딪힙니다. 늘어나는 재정적자, 추락하는 통화가치, 급등하는 인플레이션. 경제 성장세가 꺾이면서 오르반의 지지기반이 흔들립니다.

-총선을 10개월 앞둔 지금, 강력한 도전자 머저르 티서당 대표의 급부상이 오르반 정권을 위협합니다. 친정부 기업인의 부패상이 줄줄이 폭로되면서 민심이 요동칩니다.

-오르반 정권은 ‘두자녀 어머니 소득세 평생 면제’ 같은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며 방어에 나섰습니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역대급 선거가 다가옵니다.

*이 기사는 8월 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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