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오른쪽)이 7월 24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DC 상무부 회의실에서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과 면담을 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국제통화기금(IMF) 금융구제(외환위기)가 한미관계가 악화한 상황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미국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어떤 불이익을 감수하게 될지 불명확하다. 만에 하나 직접투자에 응하더라도 외국환평형기금채권을 발행하거나 민간기업이 나서서 차입 등을 통해 외화를 조달해 투자하는 방식으로 국내 외환시장에 주는 충격을 줄일 수 있다.”
한국과 미국의 관세 실무 협상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김정식 연세대 명예교수가 현 상황을 진단하며 내놓은 방안이다. 김영삼 정부 당시 한미관계는 대북 정책에 대한 이견으로 경색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해 1997년에는 주한 미국대사 자리가 1년간 비어 있기도 했다.
현재 미국은 대미(對美) 투자펀드 현금 투자를 강조하며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정부는 3500억 달러(약 484조 원)에 달하는 ‘직접’투자 요구를 수용할 수도, 25% 관세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곤경에 빠져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과 합의가 되지 않아 한국이 고율 관세를 적용받을 경우 한미관계 리스크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고 봤다.
3500억 달러는 韓 외환보유액 84%
한국은 7월 30일 미국과 타결한 관세 협상에서 미국이 한국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대신,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등을 약속했다. 이후 진행된 세부 협상에서는 이견이 계속되는 상황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9월 11일 “한국이 일본 모델을 수용하지 않으면 25% 관세를 내야 한다”고 공개 압박에 나섰다.
일본은 9월 4일 미국과의 무역 합의를 공식 이행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일본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 일본 금융기관이 5500억 달러(약 761조 원) 투자금을 미국 정부 결정에 따라 투자하고 45일 내 자금을 이체해야 한다(표 참조). 수익도 원금 회수 때까지 절반으로 나누다가 이후에는 미국이 수익의 90%를 갖는다. 사실상 미국 측이 일본으로부터 투자 백지수표를 받아낸 셈이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일본이 미국의 불합리한 요구를 수용한 점이 이해되지는 않지만, 자동차 관세에서 한국보다 하루빨리 우위를 점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계산이거나, 한국이 좋은 협상 조건을 얻어내면 재협상을 시도하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미국은 한국에도 특수목적법인(SPC)을 설립해 임기 내 투자금 전액을 직접투자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해당 조건에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 국익에 반하는 결정은 절대 하지 않는다”며 “합리성과 공정성을 벗어난 어떤 협상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9월 16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과거에 많은 동맹국이나 우방국에 상당히 좋은 협력을 해오던 미국이 아니라는 점을 실감하고 있다”며 미국에 대한 섭섭함을 공개적으로 나타냈다.
미국이 내건 조건에 난색을 표하는 이유는 직접투자가 외환시장에 미칠 타격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3500억 달러는 8월 말 기준 한국 외환보유액(4163억 달러)의 84%, 2025년 예산(673조 원)의 72% 수준이다. 한국은행이 공개한 8월 금융통화위원회 의사록을 보면 신성환 금통위원은 “미국과 협약한 대규모 투자펀드가 향후 실제로 실행될 경우 환율이 상방 압력을 받을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원화가치가 떨어져 수입 물가가 오르고, 국민의 구매력이 줄어 경제가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반면 일본은 대미 투자액(5500억 달러)의 2.4배에 달하는 1조3242억 달러(8월 말 기준) 외환보유액을 갖고 있다. 엔화를 찍어 대외 채무도 갚을 수 있는 기축통화국으로, 미국과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체결한 상태다. 통화스와프는 유사시 자국 화폐를 맡기는 대신 미리 정한 환율로 상대국 화폐를 빌려올 수 있도록 두 나라 중앙은행이 맺는 계약이다. 이에 정부는 미국 측에 무제한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외환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통화스와프 체결을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화될 가능성은 낮다. 미국은 한국과 2008년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때 한도형 통화스와프를 체결했을 뿐 일본, 유럽연합(EU), 영국 등 기축통화국과만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체결한 상태다. 이정환 한양대 국제금융학과 교수는 “무제한 통화스와프는 달러 공급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글로벌 금융 안전망을 위한 것”이라며 “정부 입장에서는 뾰족한 다른 방법이 없으니 미국에 제안한 것이겠지만 체결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
“투자처·시기 조율하는 전략이 합리적”
전문가들은 투자금 용처를 결정하는 데 양국이 참여하거나 연간 투자 한도를 정하는 식으로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한국과 일본을 통해 관세 협상 본보기를 보여주고 싶은 미국 입장에서는 직접투자 조건을 철회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며 “중간선거 등 미국 정치 지형이 달라지는 상황을 활용해 투자 조건과 시기를 조율하면서 시장 충격을 줄이는 전략이 합리적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미국과의 협력 관계를 어필해 요구 조건을 관철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김태황 교수는 “3500억 달러는 2010년부터 2014년까지 대미 무역흑자를 모두 합쳐야 나오는 금액인데, 무턱대고 경제 논리에 맞지 않는 돈을 뜯길 수는 없는 일”이라며 “정부는 조지아주 사태와 ‘마스가’(MASGA: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이를 저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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