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지인이 있다. 이 지인은 한때 빚이 있었다. 은행, 저축은행 같은 금융권은 물론, 주변 사람에게도 돈을 빌렸다. 수입에 비해 과도한 빚이었고 이자를 부담하느라 힘들어했다. 매달 자기 수입의 반 이상이 이자로 나갔다. 그러고도 일상생활이 가능했으니 아마 이자만 안 내도 잘살 수 있었을 것이다.
수입 절반을 이자로 내는 사람들
그러다 결국 사달이 났다. 일이 잘 안 풀리는 시기가 왔고, 이자를 지불하지 못했다. 빚을 갚지 못해 심각한 상황까지 갔을 때 가족이 도움을 줬다. 가진 재산을 처분해 빚을 다 갚아줬다. 이후 이 지인은 수입의 절반을 차지하던 이자를 내지 않게 됐고 원금을 상환해야 한다는 부담도 덜었다. 그동안은 힘들게 살았지만 이제 별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됐다. 나도 그 뒤로는 이 지인을 걱정하지 않았다.
얼마 전 이 지인을 다시 만났다. 그런데 또 이자를 내느라 힘들다고 한다. 빚이 다 해결된 걸로 아는데, 무슨 이자인가. 알고 보니 이 지인은 그 후 다시 빚을 냈다. 그리고 월수입의 상당 부분을 이자로 내고 있었다. 가족이 이 지인의 빚을 모두 해결해주고 몇 년 정도 흐른 때였다. 그 몇 년 사이에 매달 이자만 100만 원 이상 내야 하는 빚이 또 생긴 것이다.
빚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의 빚을 대신 갚아줘도 다시 똑같이 빚을 지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이에 관한 학술 연구도 있다. 딘 칼런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 연구팀이 2018년 발표한 논문이다.
이 연구팀은 2007년 인도 첸나이 지방에 있는 코얌베두 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사회실험을 했다. 당시 코얌베두 시장에는 2500명 넘는 노점상이 있었고, 대부분 빚을 진 상태였다. 장사를 시작하려면 물건을 들일 초기 자본이 필요한데, 그럴 자본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서 물건을 사왔던 것이다. 보통 1000루피(당시 가치로 약 20달러)를 빌려 새벽 도매상에게 물건을 사온 뒤 그날 하루 종일 장사를 해 이자를 갚는 식이었다. 이 이자는 매일 내는 일수 이자로 약 5%였다. 1000루피의 물건으로 장사해 1100루피 매상을 올린다면 이 중 1000루피는 빌린 돈이고 50루피는 이자이며 나머지 50루피만 자기 이익이다. 이걸로 한 가족이 먹고살았다.
이 연구팀은 코얌베두 시장 상인 1000명을 선정해 그중 500여 명의 빚을 갚아줬다. 그리고 빚이 없어진 상인들과 계속 빚이 있는 상인들의 재무 상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추적했다. 하루 50루피를 이자로 내던 상인의 경우 더는 빚이 없으면 단순 계산만으로도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하루에 버는 100루피가 모두 자기 몫이다. 원래 지출하던 50루피 외에 나머지 50루피를 저축할 경우 20일만 모아도 1000루피다. 그러면 그 1000루피를 다른 상인에게 빌려주고 하루 50루피 이자수익을 얻을 수 있다. 그 이자를 모으면 20일 후 또 1000루피가 된다. 40일 뒤에는 2000루피를 모을 수 있고 그 2000루피를 다시 빌려주면 하루 100루피씩 이자를 받게 된다.
이전에는 하루 종일 일해서 겨우 50루피를 벌었다. 그러나 이제는 일을 안 해도 하루 100루피를 벌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돈을 불려나가면 이 상인은 큰 부자가 된다. 그동안은 번 돈의 절반을 이자로 내야 했기 때문에 돈을 모으기 힘들고, 그래서 부자가 될 수 없었다. 상인 500여 명은 더는 이자를 낼 필요가 없으니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회실험은 빚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빚이 사라졌을 때 얼마나 많은 이가 경제적으로 잘살 수 있게 되는지를 살펴본 연구였다.
빚 갚아줬는데 1~2년 뒤 제자리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빚에서 해방되고 6주가량 지났을 때 일부 상인이 다시 빚을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2년이 지나자 대부분 전과 똑같은 상태가 됐다. 1000루피 빚을 내서 물건을 사오고, 하루 100루피를 벌어 50루피를 이자로 낸 뒤 나머지 50루피로 생활했다. 분명 1000루피 빚이 사라져 부자가 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는데도, 거의 모든 상인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상인들에게 금융 지식이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이 사회실험에서는 실험집단(빚을 갚아준 500여 명)과 통제집단(빚을 갚아주지 않은 나머지)을 통틀어 절반 정도 상인에게 금융 교육을 실시했다. 전자에게는 “이제부터 번 돈을 잘 관리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알려줬고, 후자에게는 “하루 50루피 생활비 중 5루피씩만 아끼면 200일 만에 1000루피 빚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교육시켰다. 통제집단 상인들도 하루 50루피 가운데 5루피를 계속 절약해 모으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금융 교육을 했음에도 실제로 이렇게 절약해 돈을 모으고 빚에서 벗어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사회실험에서 얻은 결론 중 하나는 이것이다. “금융 교육은 아무 소용이 없다.”
무엇보다 코얌베두 시장 상인들은 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신출내기가 아니었다. 이 상인들은 평균 9년 6개월 동안 시장에서 장사를 했다. 장사 전문가였고, 돈 전문가였다. 매일 조금씩 지출을 줄이면 지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평균 9년 넘게 장사를 하면서도 빚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칼런 교수 연구팀이 빚을 모두 상환해준 경우에도 똑같이 빚을 진 채 장사했다.
인도 사람들이 워낙 특이해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이 연구팀은 필리핀에서도 같은 실험을 했다. 필리핀 카가얀데오로 지역 상인 몇백 명의 빚도 동일하게 갚아줬다. 필리핀 이자율은 인도보다 낮았다. 인도는 하루 5%였으나 필리핀은 월 13%였다. 그럼에도 필리핀 상인 처지에서는 어마어마한 고리였다. 빚이 해결되면 그 뒤로는 잘살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필리핀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빚이 사라졌지만 시간이 지나자 다시 빚을 지기 시작했고, 1~2년 뒤에는 전과 똑같은 상태가 됐다. 이 연구팀은 빚을 대신 갚아주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다. 빚을 갚아준다고 더 잘살게 되는 것도 아니고,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몇 년 시차를 두고 전과 같은 상태가 될 뿐이다.
자기 수입의 반 정도를 이자로 지불해야 할 만큼 빚이 많은 사람은 빚이 사라지고 이자를 낼 필요가 없어지면 훨씬 더 잘살 수 있어야 한다. 빚과 이자가 사라지면 실제 수입이 2배가 되는 셈이니, 잘살게 되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런데 잘살게 되기는커녕 이전과 똑같이 빚에 허덕이는 상태가 되는 이유는 뭘까.
행운으로도 돈 습관 이길 수 없어
이를 설명할 수 있는 논리는 한 가지뿐이다. 돈은 습관이다. 빚을 지는 것은 습관이고, 매달 이자를 부담하는 것도 습관이다. 어떤 행동이 몸에 안 좋다는 사실을 알아도 그것이 습관이 되면 계속 하게 된다. 의식적으로는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하고 굳게 결심하지만 몸은 무의식중에 습관대로 행동한다. 습관을 바꾸는 건 마음을 바꾸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빚을 내는 게 습관이 된 사람은 빚이 없어지면 다시 빚을 낸다. 코얌베두 시장 상인들은 저축·빚과 관련된 습관을 조금만 바꾸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몸에 밴 습관을 바꾸지 못했다. 돈에 관한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빚이 모두 해결되는 행운이 찾아오더라도 경제적 삶은 바뀌지 않는다.
지식은 별 소용없다. 돈에 관한 습관을 바꾸는 게 경제적 삶을 바꾸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빚이 한번에 해결되는 행운도 습관을 이길 수 없다. 내 지인 얘기, 그리고 코얌베두 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는 그걸 얘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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