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이 동작’, 부정적 생각 떠오르는 것 줄이는 효과”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6월 28일 13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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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집중한 적 있었던가…‘필사’의 매력에 빠지다
좋은 글 베껴쓰는 필사, 디지털 디톡스로 인기몰이
처음엔 30분 집중도 어려워…소리 내 읽으면서 적응

육아서적인 ‘못 참는 아이, 욱하는 부모’를 필사했다.
육아서적인 ‘못 참는 아이, 욱하는 부모’를 필사했다.
16일 오후 10시. 필사(筆寫)를 위해 거실 테이블에 앉았다. 평소 같았으면 집 안에 TV 소리만 가득했을 시간이지만, 이날은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시끄럽게 느껴질 만큼 고요했다. 평소 읽고 싶었던 책에 나온 문장을 노트에 한 자, 한 자 적어내렸다. 하지만 ‘필사 초보’의 집중력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30분가량 지났을 무렵, 주말에 놓친 예능 프로그램이 불현듯 떠올랐다. ‘다 쓰고 소파에 누워서 TV를 볼까, 바로 잘까…’ 크게 중요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메우기 시작했다. 아뿔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잡생각 탓에 오탈자가 나왔다.

남의 글을 베껴 쓰는 ‘필사’가 인기를 끌고 있다. 유명인의 격언을 옮겨적거나 ‘어린왕자’ 같은 베스트셀러 소설을 베껴 쓰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이다. 최근 주요 서점에서는 필사 관련한 서적 판매량이 급증했고 일부 지방자치단체나 사찰 등은 필사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기자도 16일부터 22일까지 하루 약 1시간씩 필사를 직접 해봤다.

하루 한 장씩 육아서적인 ‘못 참는 아이, 욱하는 부모’ 필사를 해봤다. 한 페이지를 빼곡하게 쓰는 데는 약 1시간이 걸렸다.
하루 한 장씩 육아서적인 ‘못 참는 아이, 욱하는 부모’ 필사를 해봤다. 한 페이지를 빼곡하게 쓰는 데는 약 1시간이 걸렸다.

● TV 끄고, 휴대전화는 무음…뿌듯함에 성취감까지

고심 끝에 고른 책은 육아 서적인 ‘못참는 아이, 욱하는 부모’였다. 아이를 키울 때 감정을 잘 조절하는 방법을 배우고자 구매했으나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미뤄뒀던 책이었다.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필사 초보’를 위해 소설 ‘어린왕자’, ‘논어’, 나태주 시인의 시집 등을 추천했다.

필사는 매일 오후 10시경 시작했다. 온 신경을 펜 끝에 집중하기 위해 방해될 만한 물건은 치워버렸다. 퇴근 후 잠들 때까지 항시 켜있던 TV는 껐다. 단톡방 메시지가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전화는 무음으로 바꾼 뒤 멀찌감치 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요함이 생경하면서도 평온한 느낌을 줬다. 책에 있는 모든 문장을 노트에 담지는 않았다. 눈으로 책을 읽은 뒤 공감가거나 새겨두고 싶은 문장만 옮겨 적었다. 그렇게 손글씨로 매일 노트 한 페이지를 꽉 채웠다. 소요된 시간은 1시간 남짓. 흘려쓰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주고 꾹꾹 눌러쓰다 보니 2~3일은 팔 운동이라도 한 듯 통증이 있었다.

필사할 때는 한 문장을 통째로 외워 긴 호흡으로 쓰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집중이 잘 되고 책 내용도 머릿속에 더 잘 들어왔다. 잡념에 사로잡히면 잠시 멈추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집중력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어김없이 오탈자가 나오거나 글씨가 삐뚤빼뚤해졌다. 한 페이지를 빼곡하게 적은 뒤에는 작게 소리 내어 읽어봤다. 손끝에 새겨진 글이 입과 귀를 통해 더 깊게 각인되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였다면 소파에 누워 휴대전화나 TV를 봤을 시간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집중했다는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또 하루도 빠짐없이 이를 해냈다는 성취감까지 느껴졌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놓인 필사 관련 책.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놓인 필사 관련 책.

● 필사 서적 판매랑 급증…템플스테이서 필사 수업도

지난해부터는 베스트셀러 목록에 필사 책이 오르고 있다. 필사 책은 보통 왼쪽 장에 옮겨 쓸 문구가 있고, 오른쪽 장엔 직접 필사할 공간이 있다. 필사 책의 판매량은 지난해 기준(교보문고) 전년 대비 6~7배 증가했다. 예스24에서도 필사 관련 도서 판매량이 동기간 2~3배 늘었다.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노트’는 예스24가 발표한 2024년 연간 종합 베스트셀러 4위에 등극한 데 이어 2025년 상반기에도 종합 7위를 차지했다.

필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책의 범위도 확장됐다. 이전에는 문학 작품과 불경·성경 등을 주로 필사했다면 요즘은 웹소설, 명언집, 노래 가사 등도 필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필사 체험 프로그램이나 온라인 모임 등도 인기다. 19일 대한불교조계종 국제선센터에서 진행하는 ‘필사-디지털디톡스’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해봤다. 프로그램은 선명상으로 시작됐다. 이어진 필사 시간에는 108개의 글귀 중 한 개의 글귀만 골라 30분간 정성스레 옮겨적었다. 필사를 위해 엽서 크기의 한지와 붓펜이 제공됐다. 필사 장비만 달라졌을 뿐인데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국제선센터 관계자는 “프로그램에 다양한 연령층이 참여하고 있다”며 “(인원이) 많은 날에는 10여 명이 함께 듣는다”고 했다. 온라인 필사 모임은 멤버들끼리 매일 필사한 사진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템플스테이 필사 수업에서는 붓펜으로 필사를 진행했다.
템플스테이 필사 수업에서는 붓펜으로 필사를 진행했다.

● 전문가 “쉽게 집중 가능해 잡념 줄여주는 효과”

버튼만 누르면 음성녹음 파일이 텍스트로 변환되고, 손가락만 움직이면 장문의 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세상이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아날로그적 취미인 필사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1년 전부터 필사를 꾸준히 하고 있다는 40대 여성은 “마음이 복잡할 때 머리를 비우고 안정을 찾는 데 필사만큼 좋은 게 없다”며 “한 글자씩 집중해서 쓰다 보면 고민은 잊고 편안해진 마음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필사를 시작한 30대 남성은 “지치고 힘들 때마다 짧은 명언을 노트에 적고 있다”며 “필사한 문장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면 답답한 마음이 한결 나아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필사가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봤다. 2020년 한국외대 교육대학원의 한 연구에 따르면 스트레스가 있는 참가자들에게 시를 적거나 감상하게 한 결과 필사를 했을 때 스트레스 감소 폭이 더 컸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목적지향적인 행위로 필사를 하는 것은 부정적 생각이 떠오르는 걸 줄여주는 데 효과가 있다”고 했다. 하 교수는 “많은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잡념이나 불편한 감정이 올라와서 괴롭다고 얘기하는 데 생각을 생각으로 이기기 쉽지 않다”며 “필사는 정해져있는 글을 따라 쓰기만 하면 되니까 쉽게 집중해 생각이 흐트러지는 걸 줄여주는 효과가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스타그램에 ‘필사’ ‘필사스타그램’ 등을 태그한 게시물들. ‘필사’ 태그 게시물은 약 73만 개, ‘필사스타그램’ 게시물은 약 13만 개다.
인스타그램에 ‘필사’ ‘필사스타그램’ 등을 태그한 게시물들. ‘필사’ 태그 게시물은 약 73만 개, ‘필사스타그램’ 게시물은 약 13만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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