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메모는 우연일까 작전일까 - 권력 앞에서 셔터를 누르다[청계천 옆 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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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사진 No. 124

● 정치인 메모의 파장

사진이라는게 눈 앞에 있는 것을 그대로 찍을 때도 있지만 때론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정치인들의 행사는 그래서 때로는 사진기자의 접근을 허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진기자의 접근을 막고 정치인의 참모들이 찍은 사진으로 현장을 보도하도록 유도합니다.

전 세계를 상대로 무역협상을 진행하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사진은 정치인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온 국민이 마음을 졸이면서 지켜보는 가운데 31일 (미국 시간 30일)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등의 협상단이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최종 면담함으로써 무역협상을 타결했습니다. 기자들은 협상장과 발표장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백악관은 소셜 미디어에 사진 한 장을 올려 한미 관세협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사진 속에서 트럼프와 한미 협상단이 함께 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열흘 가량 앞서 있었던, 미일 간의 협상 타결 모습 역시 댄 스카비노 미국 대통령 차석보좌관의 소셜 미디어 계정을 통해 한 장의 사진으로 외부에 보도되었습니다. 트럼프의 단호한 입모양에 비해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재생상의 표정은 곤혹스러워보였습니다. 게다가 가뜩이나 체격이 큰 트럼프쪽에서 촬영된 사진은 일본 대표의 몸이 왜소하게 보이게 했습니다. 일본으로서는 참 자존심 상하는 사진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은 권력을 찍는 사진기자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정치인의 메모가 사진에 찍히면 큰 파장을 일으킵니다. 좋은 쪽이건 나쁜 방향이건 말입니다. 지난 7월 27일(현지시간) 영국 스코틀랜드 텐베리 골프장.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연합과의 관세 협상을 마친 후 기자들 앞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의 옆에는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덴 유럽연합 (EU) 집행 위원장이 앉았습니다. 트럼프의 손에는 EU의 제안서가 있었고, 그 위에 가필된 숫자가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트럼프가 크고 진하게 쓴 숫자는 마치 무슨 연설문 같았습니다. “우리는 EU가 준비해 온 투자액보다 더 많은 금액을 얻어냈고, 더 높은 관세율을 관철시켰다”는 트럼프의 메시지였습니다. 평소라면 보이지 않았을 텐데 빛을 등지고 앉아 있는 ‘역광(逆光)’ 사진이었기 때문에 메모가 정확하게 보였습니다. 그 순간, AP통신의 백악관 출입 사진기자 재클린 마틴이 셔터를 눌렀습니다.

트럼프는 말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종이에 적힌 숫자들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음을 시각적으로 전했습니다. 미국 내 지지자들은 환호했을 것이고 한국을 비롯한 다음 협상자들은 긴장해야 했습니다.

트럼프의 메모가 사진으로 유출(?)되자 전 세계가 주목했습니다. 동아일보의 경우는 숫자가 잘 보이도록 포토샵으로 반전 작업을 해서 신문 1면 사진으로 사용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EU의 제안서에 큰 글씨로 자신과 미국의 입장을 써넣은 모습. 원래 사진을 포토샵을 이용해 반전시켜 글자가 잘보이도록 편집한 이미지. 동아일보.


● 국회 난간 위에서 권력을 감시하는 카메라

우리나라에서도 정치인의 메모는 강력한 뉴스의 재료입니다. 그래서 사진기자들은 정치인의 메모를 촬영해 특종을 만듭니다. 국회의원의 문자나 메모는 뉴스 밸류가 크기 때문에 국회 본회의장 2층 사진기자석 난간에 자리를 잡는 사진기자들은 회의 때마다 고성능 망원렌즈로 의원들의 손과 눈 주변을 노립니다. 상임위 회의장에선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어 국회의원들의 휴대폰과 메모의 노출 위험은 더 큽니다. 어떤 의원은 기자들이 잘 보이도록 아예 휴대폰을 살짝 꺼내 보이며 ‘애드벌룬’을 띄우기도 합니다. 여론의 방향을 가늠해 보려는 정무적 계산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몰래 카메라 형식이라 항의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정치인들은 항의 없이 넘어갑니다.

2000년 2월 10일, 선거법 개정안 표결을 앞두고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가 메모지를 들여다보는 모습. 동아일보 DB


정치인에 대한 몰래 카메라는 언론과 권력의 관계에 따라 큰 변화를 겪습니다. 권력의 힘이 강하면 언론이 정치인에게 불리한 장면을 촬영하기도 어렵고 보도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습니다. 정치인에 대한 고발 사진은 민주화 정도와 밀접합니다.

또 하나 변수는 카메라 렌즈의 기술력입니다.

1992년 10월 12일, 민자당 김영삼 총재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수첩에 무언가를 적는 모습의 사진입니다. 당시의 망원렌즈로는 수첩을 찍는다고 해도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1992년 국회에서 메모하는 김영삼 의원. 동아일보 DB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지금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메모나 화면이 사진으로는 분명하게 촬영됩니다.

사진으로 찍힌 정치인 메모 중 필자가 기억하는 첫 사례는 2000년 12월 1일, 당시 민주당 장재식 예결위원장이 같은 당 김경재 의원에게 보낸 메모였습니다. 당시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의 발언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쪽지였는데 조선일보 사진기자 이기원이 촬영해 신문에 보도했고, 국회는 파행을 맞았습니다.

김경재 의원은 기자회견을 열어 “이는 명백한 사생활 침해”라며 “서양에서 말하는 피핑 톰(Peeping Tom), 파파라치와 같다”고 항변했지만, 공공의 공간에서 발생한 일이라는 점에서 정치권은 크게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장재식 위원장이 김용갑 의원에게 사과하고 사태는 마무리됐습니다.

메모가 뉴스가 된 대표 사례 중 하나는 2015년 1월, 김무성 의원이 적은 것으로 보이는 ‘문건 파문의 배후는 K,Y. 내가 꼭 밝힌다. 두고 봐라. 곧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쪽지였습니다. 이 메모는 곧바로 정치권을 흔들었습니다.

● 메모의 진실과 왜곡

요즘은 메모를 넘어, 휴대폰 노트북 태블릿까지 기자들의 관찰 대상이 다양해졌습니다.

2017년 겨울, 국민의당 권은희 원내수석부대표와 박홍근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의 카카오톡 문자가 사진기자의 망원렌즈에 포착되면서 국회는 또 한바탕 파동을 겪었습니다. 야당인 자유한국당을 배제하고 국민의당이 호남 지역 SOC 예산을 얻기 위해 예산안 통과에 협조한다는 의혹이 불거진 것입니다. 2019년에는 국회 회의장에서 공동경비구역(JSA) 대대장이 청와대 관계자에게 보낸 ‘북한 주민 2명을 추방했다’는 문자가 포착돼 정치권이 요동쳤습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보낸 ‘체리 따봉’ 이모티콘이 여당 지도부의 스마트폰에 저장된 것이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2007년 11월 22일, 국회 최고위원회의에서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가 박재완 비서실장에게 메모를 건네받는 모습. 동아일보 DB
2007년 11월 22일, 국회 최고위원회의에서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가 박재완 비서실장에게 메모를 건네받는 모습. 동아일보 DB

2007년 11월 5일,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가 박재완 의원에게서 박근혜 전 대표의 입장이 적힌 쪽지를 받아 읽는 장면. 동아일보 DB
2007년 11월 5일,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가 박재완 의원에게서 박근혜 전 대표의 입장이 적힌 쪽지를 받아 읽는 장면. 동아일보 DB
2005년부터 국회 본회의장 각 의원석에 노트북이 설치되면서, 의원들이 방심하고 야한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습니다. 보안필름이 있긴 하지만 실제 사용하는 의원은 거의 없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메모는 생각지도 않은 방식으로 유출되기도 합니다. 2018년 3월 5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회담 중 작성한 메모 일부가 북한 노동신문에 의해 공개됐습니다. 노동신문은 메모를 따로 보도하지 않았지만 해상도 높은 사진을 잘라서 확대해보니 “한미훈련으로 단절 없어야”, “김정은이 엄포”라는 문구가 보였고, 당시 한미관계를 두고 중요한 해석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2018년 방북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메모가 북한 노동신문에 의해 공개되었다.
2018년 방북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메모가 북한 노동신문에 의해 공개되었다.


● 권력 앞의 셔터, 셔터 앞의 권력

세계를 상대로 미국 대통령이 벌이고 있는 일방적 협상이 1차 마무리 되어가고 있습니다. 디테일을 점검하는 수많은 협상과 타결이 앞에 남아 있습니다. 트럼프와 미국이 국제 사회에서 어떤 이미지 정치를 할지 지켜볼 일입니다.

이번 주 EU와의 협상을 마무리하며 트럼프가 발표장에서 들었던 종이 한 장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사진기자의 순발력은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비슷했습니다. 찰나의 순간 잠깐 열리는 메모나 화면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트럼프의 메모 사진은 단순한 기록일까요? 트럼프의 의도된 연출이었을까요? 아니면 기자의 예리한 관찰력이 빚어낸 특종이었을까요?

아니면 복합적인 무언가 일까요?

사진기자들에게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난간은 아슬아슬한 담벼락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의원들의 메모와 휴대폰 화면이 혹시나 전략은 아닐까, 우리의 사진이 세상을 왜곡하는 것은 아닐까 해서 말입니다. 포착과 함께 의도에 대한 질문도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더위 잘 보내시고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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