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궁지로 모는 ‘엡스타인 파일’

  • 주간동아
  • 입력 2025년 8월 2일 09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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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공개 약속했다가 말 바꾸자 MAGA 지지층 이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제프리 엡스타인이 1997년 함께 찍은 사진이 주런던 미국대사관 근처에 붙어 있다.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제프리 엡스타인이 1997년 함께 찍은 사진이 주런던 미국대사관 근처에 붙어 있다. 뉴시스
‘제프리 엡스타인 스캔들’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갤럽이 미국 성인 1002명을 대상으로 7월 7~21일(이하 현지 시간)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직무수행 긍정평가는 37%로 2기 정부 출범 후 최저치로 떨어졌다. 핵심 지지층인 ‘마가’(MAGA: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조차 트럼프 대통령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가를 중심으로 불을 지펴 온 음모론과 트럼프 대통령의 과거 행적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 감옥에서 사망한 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과 살아 있는 최고 권력자 트럼프 대통령은 과연 어떤 관계였을까.

의문1 엡스타인의 죽음
금융계 출신 억만장자인 엡스타인은 2019년 8월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교도소의 감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자신의 별장과 사유지로 미성년자를 유인해 성 착취 및 인신매매를 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앞두고 있었다. 검시관은 자살로 결론 내렸으나 의혹이 뒤따랐다.

엡스타인은 1990년대 펀드매니저 일을 시작해 정관계와 재계를 막론하고 유수의 인맥을 만들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찰스 3세 영국 국왕의 동생 앤드루 왕자 등 유력 인사와 친분을 쌓았다. 그가 죽은 뒤에도 엡스타인이 성 접대 리스트를 갖고 있었고 여기에 이름을 올린 세력이 그를 타살했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엡스타인은 성 접대 리스트뿐 아니라, 15억 달러(약 2조 원)에 달하는 자금 거래 의혹도 받고 있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 강성 지지층인 마가는 성 접대 리스트 음모론을 넘어 연방 공무원들의 비밀 집단인 ‘딥 스테이트’가 엡스타인의 사망에 관여했다고 주장한다.

미 법무부와 연방수사국(FBI)은 7월 초 엡스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증거로 감방 주변이 녹화된 11시간 분량의 영상을 공개했다. 하지만 자정 즈음 타임라인에 1분가량 공백이 발생해 타살 의혹은 더 커졌다. 미국 CBS 뉴스는 7월 28일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FBI, 연방교정국, 법무부 감찰관실은 해당 1분이 잘리지 않은 영상을 갖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의문2 트럼프의 변심
문제는 이러한 ‘엡스타인 음모론’에 기름을 끼얹은 사람이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그는 지난해 대선 선거운동 기간에 “내가 당선한다면 ‘엡스타인 파일’의 기밀을 100% 해제할 것”이라고 발언해 지지자들을 자극했다. 2월에는 팸 본디 미 법무장관이 “엡스타인 리스트가 내 책상 위에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돌연 태도를 바꿨다. 7월 17일 자신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트루스소셜 계정에 엡스타인 관련 논란을 급진 좌파 민주당이 주도하는 사기극으로 규정하면서 일부 어리석은 공화당원이 사기에 속았다고 썼다. 본디 장관 역시 “명단도 없고, 추가로 공개할 문서도 없다”고 말을 바꿨다. 미국 법무부와 FBI는 엡스타인이 자살했다는 문서를 공개했다. 하지만 엡스타인 파일 공개를 기대했던 마가는 붉은 마가 모자를 불태우는 장면을 SNS에 공유하고 본디 장관 사퇴를 요구하는 등 트럼프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트럼프 2기 정부의 태도가 달라진 원인으로 엡스타인 사건에 트럼프 대통령이 연루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7월 23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엡스타인 파일에 트럼프 대통령이 여러 번 등장하는 걸 발견한 본디 장관이 5월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고 보도했다.

의문3 엡스타인과 트럼프의 관계
엡스타인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트럼프 대통령과 친분을 맺었다. 두 사람은 플로리다주 상류층 사교 모임에서 자주 어울린 것으로 알려졌다. 1992년 ‘트럼프 별장’인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한 두 사람의 모습이 방송 카메라에 담겼으며, 2000년 같은 장소에서 엡스타인과 트럼프 부부가 함께 촬영한 사진도 남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02년 ‘뉴욕 매거진’과 인터뷰에서 “엡스타인과 15년간 교류했다”며 “그는 나만큼 미녀를 좋아하는데, 그 미녀들이 대부분 나이가 어리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 언론들은 과거 트럼프 대통령과 엡스타인의 관계를 추적하고 있다. 7월 17일 WSJ는 트럼프 대통령이 2003년 엡스타인에게 보낸 ‘나체 여성 그림 편지’에 대해 보도했다. WSJ는 “벌거벗은 여성 윤곽선 그림 안에 타자기로 친 문장이 쓰여 있었고, ‘생일 축하한다’는 문구와 함께 ‘도널드’라는 서명이 있었다”고 전했다. 이어 CNN은 22일 “1993년에도 엡스타인이 트럼프의 두 번째 결혼식에 참석한 사진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을 상징하는 ‘마가’(MAGA: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모자가 불타고 있다. X(옛 트위터 캡처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을 상징하는 ‘마가’(MAGA: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모자가 불타고 있다. X(옛 트위터 캡처
트럼프 대통령은 ‘엡스타인 스캔들’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 7월 18일 WSJ를 상대로 100억 달러(약 14조 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29일 스코틀랜드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는 “엡스타인이 나를 위해 일하는 직원을 데려갔다”며 엡스타인과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1일 자신의 SNS 계정에 인공지능(AI)으로 만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체포 영상을 게시하는 등 자신에 대한 화살을 민주당 인사에게로 돌리려는 시도도 하고 있다.

하지만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 등 과거 트럼프 행정부 인사와 공화당 의원 사이에서도 엡스타인 파일를 공개하지 않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현재 미국 하원 감독위원회는 엡스타인의 공범이자 옛 연인이던 길레인 맥스웰을 불러 증언을 받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문영훈 기자 yhmoon93@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500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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