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 ‘민간기업 통제’ 논란
트럼프, 인텔 지분 10% 인수 발표… 방산-조선 등도 지분 투자 움직임
금리-정부 통계는 이미 간섭 심화… “과거 후퇴”“사회주의자냐” 비판
中 ‘국가 자본주의’ 모방 의혹도… 주주총회 의결 거부권 ‘황금주’ 등
시진핑의 경영 개입 행태와 닮아… 내년 11월 美 중간선거가 분수령
이전까진 현재 정책 막을 길 없어… 핵심 지지층서 비판 커지면 제동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이 중국식 ‘국가 자본주의’를 닮아가고 있다.”(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트럼프 대통령은 ‘계획경제주의 총사령관(Dirigiste-in-chief)’이다.”(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트럼프 대통령은 사회주의자인 듯하다.”(블룸버그통신)
세계 자본주의의 총본산 격인 미국이 권위주의 독재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국가 자본주의를 추구하고 있다는 지적이 주요 외신들에서 잇따라 나오고 있다. 재집권 9개월 차에 접어든 트럼프 행정부가 반도체 제조기업 인텔의 지분 10%를 인수해 최대주주가 되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방산·조선 등 다른 산업의 지분 인수도 검토 중이라고 밝히면서다. 국가 자본주의란 국가가 민간기업의 경제활동을 통제하거나,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경제체제로 중국이나 러시아가 대표적이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결정이나 고용통계와 같이 정치적 중립이 중요한 경제 분야에도 적극 개입하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에 대해 WSJ 등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시진핑 정부의 국가 개입주의를 따라 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권위주의 리더십이 경제 분야에서 과도한 개입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국가 자본주의 행보를 분석하고, 향후 국면을 전망해 봤다.
● FT “트럼프 행정부, 민간부문 장난감처럼 다뤄”
지난달 22일 트럼프 대통령은 인텔 지분 10%(4억3330만 주)를 89억 달러(약 12조3710억 원)를 들여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가 반도체법(CHIPS Act·칩스법)에 따라 배당한 보조금 57억 달러를 동원해 지분을 사들이겠다는 것. 나머지 32억 달러는 보안 칩 생산을 위한 별도의 지원금에서 충당하기로 했다. 매입이 완료되면 미국 정부가 현재 인텔 지분 8.92%를 보유한 자산운용사 블랙록을 제치고 최대주주가 된다.
이에 대해 인공지능(AI) 패권 경쟁이 세계적으로 치열한 가운데 미국 내 반도체 생산 거점을 확보하려는 포석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현재 미국 반도체 산업을 이끄는 퀄컴, 엔비디아, AMD 등은 생산공장이 없는 설계 중심의 팹리스(fabless) 업체들이다. 그렇다 보니 전쟁이나 팬데믹 등 공급망 위기 상황에서 반도체 수급이 막힐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인텔은 반도체 설계뿐 아니라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부문도 갖추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인텔 지분 인수 발표 후 트루스소셜에 “인텔이 수행하는 최첨단 반도체 제조는 우리 국가의 미래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인텔 지분 확보 발표는 트럼프 대통령이 립부 탄 인텔 최고경영자(CEO)의 중국 연계 의혹을 거론하며 사임을 압박하는 가운데 이뤄졌다. 2015∼21년 탄 CEO가 반도체 설계기업 케이던스 디자인 시스템스를 이끌던 당시, 이 회사가 중국 국방과학기술대를 대리하는 위장 업체들에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를 판매해 수출 통제 규정을 위반한 혐의로 1억4000만 달러(약 2000억 원)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일각에선 이런 상황과 맞물려 트럼프 행정부와 인텔의 지분 인수 합의가 일부 강제성을 띤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FT는 “미국이 자국의 반도체 제조 역량을 재건하고자 하는 데에는 분명 강력한 국가안보적, 경제적 이유가 있다”면서도 “트럼프 행정부의 방식은 민간 부문을 장난감처럼 다루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인텔은 지난달 25일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공시를 통해 미국 정부의 지분 투자가 이뤄질 경우 해외 매출 타격, 투자자 및 직원들의 반발 등 리스크가 초래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인텔은 “추후 정권이 교체될 경우 이번 합의가 취소되는 등 주주들에게 리스크를 안길 수 있다”고 했다.
인텔 지분 인수를 둘러싼 우려와 반발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인텔 지분 취득은 미국에 수익을 주는 거래다. 할 수 있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거래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백악관 당국자도 뉴욕타임스(NYT)에 “인텔은 냄비나 프라이팬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다. 국가안보에 매우 중요한 회사이기 때문에 지분 인수는 정당하다”고 두둔했다.
● 외국 기업에도 ‘황금주’ 요구하며 경영 개입
트럼프 행정부는 민간기업에 대한 지분 인수를 반도체뿐 아니라 조선, 방산 분야로 확대할 가능성도 시사했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지난달 27일 폭스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지분 확보가 가능한 분야로 조선업을 언급하며 “우리가 미국에서 자급자족해야 하는 대단히 중요한 산업”이라고 주장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자국 방산업체 록히드마틴과 관련해 인텔과 비슷한 거래가 논의 중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록히드마틴은 매출의 97%를 미국 정부에서 만들어주기에 사실상 정부의 한 부문”이라며 “그들은 사실상 미국 정부의 한 부분과 다름없다”고 했다. 7월엔 미 국방부가 자국의 주요 희토류 광산업체인 MP머티리얼스의 지분 15%를 인수해 최대주주가 됐다.
트럼프 행정부의 민간기업에 대한 영향력 확대는 외국 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올 6월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 허용 조건으로 주요 의사결정에 개입할 수 있는 ‘황금주’를 받아낸 게 대표적이다. 황금주는 단 한 주만으로도 이사회의 주요 의사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특별주식이다.
지분 인수뿐 아니라 사실상의 세금을 새로 만들어 기업 경영을 통제하는 시도도 있다. 지난달 트럼프 행정부는 엔비디아와 AMD의 반도체 대중(對中) 수출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중국 내 매출의 15%를 일종의 ‘수출세’로 거둬들이기로 했다.
거시경제 정책 운영에서 그동안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해 온 정부 통계 관리나 금리 결정에서도 정부 간섭이 노골화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집권 직후부터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에게 금리 인하를 압박하며 대놓고 사임을 요구했다. 또 고용통계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발표되자, 미 노동부 노동통계국(BLS) 국장을 즉각 해임했다. 모두 미 행정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조치들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대통령이 시장에 과도하게 개입할 경우 정책의 일관성이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고, 특혜나 부패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어소시에이츠를 설립한 레이 달리오는 “민간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금융과 경제 상황을 통제하려는 욕구에서 뿜어져 나온 강력한 독재 리더십의 일종”이라며 “지금 정치, 사회적 현상은 1930, 40년대 세계에서 있었던 현상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행정부를 1930, 40년대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 만연했던 파시즘 정권에 비견한 것. 토드 해리슨 미국기업연구소(AEI) 국방 선임연구원은 “정부가 파산 위기에 처하지 않은 건전한 기업의 지분을 인수할 법적 권한이 있는지 의문”이라며 “지분 인수 시 정부 계약 입찰 경쟁에 영향을 줘 시장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했다.
주요 외신들도 트럼프 행정부의 유례없는 경제 정책에 주목하며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WSJ는 “트럼프 행정부의 인텔 등 민간기업 지분 인수 시도가 보수주의자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샀지만 좌파의 찬사를 이끌어 냈다”며 “기저에 ‘국가 자본주의’가 깔려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전했다. FT는 트럼프 대통령을 ‘계획 경제주의 총사령관’이라고 지칭하며 “민간기업에 대한 미국 정부의 대응법을 뒤집고 공화당의 자유시장 철학을 산산조각 냈다”고 평했다.
일각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을 따라 ‘국가주도형 시장경제’를 추진하고 있다는 분석을 제기하고 있다. 최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부의 재분배를 뜻하는 이른바 ‘공동부유(共同富裕)’를 국정기조로 앞세워 반기업 행보를 보인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기업 경영에 개입하는 것이 이런 행태와 유사하다는 것.
시 주석은 2013년 주석 취임 후 정부 규제를 벗어나려 하거나, 미국 증시 상장을 추진하는 정보기술(IT) 기업들을 상대로 철퇴를 휘둘렀다. 마윈(馬雲) 알리바바 창업주가 2020년 상하이 콘퍼런스에서 “중국 규제 당국이 혁신을 막는다”고 비판한 뒤 중국 정부의 눈 밖에 나 은둔에 들어간 게 대표적이다. 당시 중국 정부는 마윈이 세운 전자결제 기업 앤트그룹의 홍콩·상하이 증시 상장을 연기시켰다. 또 앤트그룹과 알리바바에 총 5조 원에 가까운 막대한 벌금을 부과했다. 중국 정부의 전방위 보복 조치에 결국 마윈은 2022년 앤트그룹의 지배권을 내려놓았다.
중국 최대 승차 공유 서비스 디디추싱(滴滴出行) 역시 시 주석의 심기를 거슬러 표적이 됐다. 2021년 6월 디디추싱은 미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기업공개(IPO)를 마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중국 당국 조사를 받고 상장폐지를 결정했다. 이와 함께 고객 신규 가입이 중단되고, 80억2600만 위안(약 1조5600억 원)에 달하는 벌금도 부과받았다.
중국 정부는 홍콩 최대 부호 리카싱(李嘉誠)이 소유한 CK허치슨홀딩스의 파나마 운하 항구 매각에도 개입했다. 올 3월 CJ허치슨홀딩스가 파나마 운하 항구 2곳의 운영권을 트럼프 대통령과 가까운 미국 금융기업 블랙록에 매각하기로 하자 시 주석이 “격노했다”고 WSJ가 보도했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관문인 파나마 운하에 중국 국영기업들이 집중 투자한 상황에서 주요 항구를 미국 기업에 넘기기로 한 데 따른 것. 이에 중국 당국이 해당 거래에 대한 반독점법 위반 조사에 착수하면서 매각이 지연되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중국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제철에 요구한 황금주와 유사한 제도를 고안해 기업 통제에 이용하고 있다. 시 주석은 취임 직후 주요 기업들의 우선주 1%를 ‘특별관리 주식’이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확보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 등 주요 기업들의 주주총회에서 의결사항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일부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 의제를 추구하기 위해 중국과 비슷한 시장 개입 정책을 펴고 있다고 말한다. 기업 및 통상 정책에 적극 개입해 국가안보에도 중요한 AI, 조선, 방산 분야의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의도라는 것. 이를 통해 미국 경제에 막대한 부담을 안기고 있는 재정 적자도 해소할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민정훈 국립외교원 미주연구부 교수는 “자유무역 시스템을 구축하고 세계 경제를 이끌던 미국은 별도의 산업 정책이 없었다”며 “하지만 지금은 미국의 산업 경쟁력이 과거보다 낮아졌고 재도약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짚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 정부와 유사한 시장 개입을 통해 반전을 꾀하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같은 방식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이 되는 방식으로 중국을 이기려고 하는데 그래선 안 된다”고 했다. 중국이 정부 지원으로 전기자동차나 AI 분야에서 좋은 성과를 거뒀지만, 부동산 부문에선 오히려 대규모 미분양을 양산하는 등 실패했다는 것. WP는 “우리는 항상 해왔던 방식, 자유시장 체제를 바탕으로 경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 경쟁력과 상관없이 자신의 권위주의 리더십에 따라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미국의 자유주의 성향 싱크탱크인 케이토연구소의 태드 디헤이븐 연구원은 “트럼프의 철학은 공산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니다”라며 “그는 아무 전략도 계획도 없이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권력을 휘두르려는 것”이라고 했다. 하상응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은 근본적으로 반시장주의적 권위주의”라며 “우익이냐 좌익이냐를 떠나 일종의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내년 11월 연방의회 중간선거 향후 행보에 관건”
전문가들은 내년 11월 연방의회 중간선거 결과가 트럼프의 향후 국가 자본주의 행보에 상당한 영향을 줄 거라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선거 전까지는 당분간 이 같은 정책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오히려 공화당 승리를 위한 경제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현 정책을 고수할 유인이 크다. 민 교수는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시장 개입의 명분이 있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당장의 반대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며 “유권자들은 정부 정책이 실물경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따라 투표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하 교수도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보수 지지층은 절대 민주당을 찍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며 “현재로선 그의 권위주의 정책을 제어할 수단이 없다”고 말했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세계적인 저성장 흐름 속에서 미국 경제가 눈에 띄게 좋아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며 “내년 선거는 필연적으로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심판 선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핵심 지지층인 노동자나 저소득층에서 비판 여론이 커질 경우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에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