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또 ‘면박 회담’… 남아공 정상 면전서 ‘백인학살 의혹’ 추궁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5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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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영상 기습적 튼뒤 ‘묘지’ 주장… 남아공 대통령 설명엔 냉소로 일관
‘학살론’ 제기한 머스크도 회담 배석
남아공 대통령 “우린 항공기 못줘”… 트럼프 “준다면 받았을 것” 맞받아

21일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중 남아공에서 백인 농부 집단 학살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며 이와 관련된 자료를 들어 보였다. 워싱턴=AP 뉴시스
21일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중 남아공에서 백인 농부 집단 학살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며 이와 관련된 자료를 들어 보였다. 워싱턴=AP 뉴시스
“조명을 끄고 이걸 틀어 달라. 이 사람들은 모두 살해됐다.”

21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도중 갑자기 참모에게 동영상을 틀 것을 지시했다. 라마포사 대통령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방영된 동영상에는 남아공의 강경 좌파 정치인이 백인을 겨냥한 폭력을 선동하는 장면과 시골 도로 옆으로 하얀 십자가가 늘어선 모습 등이 담겨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십자가 영상을 가리키며 백인 농부 1000명 이상이 흑인에게 집단 학살돼 묻힌 묘지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뉴욕타임스(NYT)와 남아공 현지 매체들은 그의 ‘백인 묘지’ 주장 등은 사실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회담 중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로 방영된 영상에는 남아공 강경 좌파 정치인이 백인에 대한 폭력을 선동하는 연설이 담겨 있었다. 워싱턴=AP 뉴시스
회담 중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로 방영된 영상에는 남아공 강경 좌파 정치인이 백인에 대한 폭력을 선동하는 연설이 담겨 있었다. 워싱턴=AP 뉴시스
트럼프 대통령은 남아공의 악명 높은 흑인 차별 정책 ‘아파르트헤이트’가 1991년 끝나고 흑인 정권이 계속 집권하면서 현지의 백인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근거가 빈약한 주장을 거듭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남아공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중 면전에서 갑자기 백인 학살을 주장하는 동영상을 전 세계에 생중계하자 워싱턴포스트(WP)는 “인종 문제를 대하는 선택적이고 분열적인 그의 접근법이 또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남아공 현지 언론은 동영상 기습 상영을 ‘매복’이라 표현하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2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백악관 정상회담 때 “당신에게는 러시아와 협상할 카드가 없다”면서 면박을 주며 압박했을 때와 유사한 상황이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 백인 희생자 관련 종이 건네며 “죽음”

이날 회담은 처음엔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라마포사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남다른 ‘골프 사랑’을 고려해 자국 출신 골프 스타 어니 엘스와 레티프 구센을 회담에 대동했다.

하지만 한 기자가 “남아공에서 백인 학살이 없다는 점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이해시키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한가”라고 묻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라마포사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남아공 국민의 목소리를 들으면 된다”며 넘어가려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 남아공 백인이 탄압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반적으로 (집단 살해를 당하는 사람은) 백인 농부들”이라며 “백인 농부들이 남아공을 떠나고 있다. 슬픈 일”이라고 말했다. 라마포사 대통령에겐 “당신은 그들(흑인들)이 땅을 빼앗도록 허용했다”고 몰아세웠다. 백인 희생자 내용이 적힌 종이 뭉치를 건네더니 “죽음”이란 말도 반복했다. 그러자 라마포사 대통령은 “실제 범죄로 희생되는 사람은 백인만이 아니다. 오히려 대다수는 흑인”이라고 맞섰다. 결국 이날 회담은 ‘백인 집단 살해’ 주장을 둘러싼 공방전 양상으로 흘렀다. 라마포사 대통령은 남아공 광물 자원의 공동 개발, 미국과의 교역 확대 등을 논의하려 했지만 향후 협상이 어려워졌다는 평가도 나왔다.

● ‘백인 학살론’ 제기한 머스크도 배석

트럼프 대통령은 올 1월 재집권 후 내내 남아공을 ‘백인 차별 국가’라고 주장하며 비판했다. 남아공에서 백인 농부가 살해당한다는 주장은 수차례 제기했고 원조도 대폭 삭감했다. 3월엔 에브라힘 라술 전 주미 남아공 대사를 전격 추방했다. 무슬림인 라술 전 대사가 반이민 등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각종 정책을 비판해 왔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행보의 배후에 남아공 출신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이며 ‘퍼스트 버디’로도 불리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머스크는 그간 여러 차례 ‘백인 학살론’을 제기했고 이날 회담에도 배석했다.

‘흑인에 대한 특혜가 과도해 오히려 백인이 피해자로 전락했다’는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인식이 이날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날 라마포사 대통령과 남아공 대표단은 ‘백인만이 피해자가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하며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무관심과 냉소로 일관했다. NYT는 “트럼프 대통령은 남아공 측에선 백인 골프 스타 엘스와 구센, 백인 재벌 요한 뤼퍼르트 등이 말할 때만 경청했다”고 꼬집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전제 군주가 집권 중인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아랍에미리트(UAE)를 방문했을 때 세 나라의 낙후된 민주주의와 인권 탄압 등을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 오히려 항공기 대량 구매 등 미국에 큰 이익을 안긴 세 나라를 칭송하기 바빴다. 이런 그가 민주주의 국가인 남아공을 ‘백인 박해’를 이유로 비판하는 건 모든 것을 거래에 기반해 생각하는 면모를 또 한 번 분명히 드러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한편 라마포사 대통령이 정상회담 중 “나는 (미국에) 줄 항공기가 없다”며 뼈 있는 농담을 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그랬으면 나는 받았을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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