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강력하게 추진했던 ‘조력 사망 합법화’ 법안이 27일 프랑스 하원 의회를 통과했다. 최종 발효될 경우 네덜란드와 벨기에 등에 이어 유럽연합(EU)에서 8번째로 조력 사망을 허용하는 나라가 된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 등에 따르면 하원 의회는 이날 찬성 305표, 반대 199표로 해당 법안을 가결했다. 말기 환자들이 시설이나 가정에서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는 완화의료(호스피스) 권리를 확립하는 법안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두 법안 모두 상원을 거친 뒤 다시 하원의 법률 검토를 거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지만, 2027년 프랑스 대선 전에는 현실화할 가능성이 크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날 X(엑스)에 “중대한 걸음”이라며 “다양한 감수성과 의심, 희망을 존중하며 내가 희망했던 형제애의 길이 점차 열리기 시작했다”라고 환영했다. 2022년 재선에 성공한 마크롱 대통령의 핵심 공약이었던 조력 사망법안은 지난해 5월 의회에서 심의가 시작됐다. 마크롱 대통령이 6월 의회를 전격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치르는 바람에 중단됐다가 올해 논의가 재개됐다.
해당 법안은 만 18세 이상 프랑스 국적자이거나 프랑스에 합법적으로 거주하는 환자에게만 엄격한 조건에 제한해 적용된다. 또렷하게 의사 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정신질환이나 알츠하이머 등 신경 퇴행성 장애가 있는 환자는 제외된다. 환자는 조력 사망 요청서를 제출했더라도 언제든지 이를 철회할 수 있다.
의료진은 환자의 질병이 치료 불가능하며 이미 상당히 진행됐거나 말기 단계여서 극심한 심리적·신체적 고통에 시달린다는 것을 확인한 경우 환자의 요청에 따라 약물을 통해 삶을 마감할 수 있게 허용한다. 만일 환자가 해당 약물을 스스로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면 간호사나 의사가 투여할 수 있다. 누구든 타인의 ‘죽을 권리’를 방해할 경우 2년의 징역형과 3만 유로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는 조항도 포함됐다.
현재도 프랑스는 연명치료 중단을 통한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다. 2023년 무작위로 선정된 시민 184명으로 구성한 공론화위원회에서는 대다수(95%)가 완화 치료 확대를 지지했고, 약 76%는 엄격한 조건을 전제로 한 의학적 안락사를 지지했다.
하지만 이번 법안을 놓고 보수진영과 보건 의료계, 가톨릭 전통이 강한 종교계에서는 “노인과 장애인들이 안락사를 선택하도록 압박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여전히 반대 목소리가 나온다. 24일 의회 앞에서 법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한 44세 파킨슨병 환자는 “이 법안은 침대 옆 탁자에 탄약이 든 권총을 놓아둔 것과 같다”고 영국 BBC방송에 말했다.
만일 해당 법안이 발효될 경우 프랑스는 조력 사망을 인정하는 이웃 유럽 국가들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가장 먼저 나선 스위스에서는 1940년대부터 조력사가 합법화되면서 생을 마감하고자 하는 해외의 불치병 환자들의 마지막 목적지가 돼왔다. 비영리단체 존엄사권리협회(ADMD)도 그동안 이번 조력사 허용 법안과 관련해 “프랑스인들은 생을 마감하기 위해 1만~1만5000유로(약 1500만~2300만 원)를 내고 다른 나라를 향해야 했다”라며 통과를 촉구해 왔다.
EU에서는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2002년부터 환자의 요청에 따라 간병인이 자살을 조력하는 안락사가 합법화됐고,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도 각각 2021년과 2022년 심각한 난치병 환자에 대한 안락사를 합법화했다. 룩셈부르크와 포르투갈, 독일도 조력사를 비범죄화했다. 영국에서는 현재 적극적 안락사 관련 법안이 심의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의 경우 2018년부터 연명의료 중단을 통한 소극적 안락사는 허용되지만, 의료진이 개입하는 조력사나 적극적 안락사는 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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