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군 병사가 우크라이나 키이우 인근 이르핀에서 지뢰 해체 작업을 하고 있다. 뉴시스
“발트해 슈체친(폴란드 북서부)에서 아드리아해 트리에스테(이탈리아 북동부 항구로 현 슬로베니아 접경지)까지 ‘철의 장막’이 대륙을 가로질러 드리워지고 있다.”
러시아 다음 타깃은 인접 5개국? 제2차 세계대전 영웅인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가 퇴임 직후인 1946년 3월 5일(이하 현지 시간) 미국 웨스트민스터대에서 연설한 내용 중 일부분이다. 당시 처칠 전 총리는 소련이 중·동유럽을 지배하고자 이른바 ‘철의 장막(Iron Curtain)’을 구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처칠 전 총리의 연설을 기점으로 미국 등 서방과 소련이 대결하는 ‘냉전 시대’가 시작됐다. 이후 ‘철의 장막’은 냉전 시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WTO)가 수천㎞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경계선을 가리키는 용어가 됐다. 그로부터 79년이 지난 2025년 현재 나토가 러시아의 침공 위협에 맞서 ‘새로운 철의 장막(New Iron Curtain)’을 만들고 있다.
새로운 철의 장막은 핀란드,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발트 3국), 폴란드 등 나토 5개 회원국이 러시아와의 국경 지대에 구축하는 방어선을 뜻한다. 유럽 북부·중부 지역에 있는 이들 5개국은 러시아 및 러시아 군사동맹인 벨라루스와 3500㎞에 달하는 국경선을 맞대고 있다. 과거 소련의 침략으로 국토를 빼앗기는 등 인적·물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바 있다.
이 때문에 이들 5개국은 러시아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자국이 다음 타깃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해왔다. 카르스텐 브로이어 독일군 합참의장은 “나토 회원국은 앞으로 4년 내에 러시아의 공격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며 “리투아니아, 폴란드, 러시아, 벨라루스가 접경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 ‘수발키 회랑(Suwalki Gap)’이 가장 취약한 지역”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도 “러시아가 핀란드, 발트 3국 등 북유럽 국가들과의 국경 인근에서 군비를 대폭 확충하고 있다”며 “러시아군이 최근 핀란드 국경에서 동쪽으로 160㎞ 떨어진 페트로자보츠크에 군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핀란드,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발트 3국), 폴란드 등 5개국은 러시아의 침공 위협에 대비해 국경 지역에 지뢰를 대거 매설할 계획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GETTYIMAGES러시아, 지뢰 매설해 우크라이나 탈환 저지 이에 따라 이들 5개국은 러시아의 침공 위협에 대비해 국경 지역에 지뢰를 대거 매설할 계획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무엇보다 대인지뢰금지협약에서 잇따라 탈퇴하는 상황이다. 대인지뢰는 사람이 밟거나 가까이 접근하면 터지도록 설계된 소형 폭발 무기다. 적군이 특정 지역에 접근하는 것을 막을 수 있어 주로 방어용으로 사용된다. 대인지뢰는 직경 850㎝ 크기에 둥글고 납작한 형태와 원통형 등 종류가 다양하며, 사람이 매설하거나 포탄, 로켓, 집속탄으로 발사해 살포한다. 헬리콥터 또는 트럭에 탑재된 발사기를 이용하기도 한다. 지뢰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살상하는 무기로, 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이 지나도 민간인 피해자가 발생해 비인도적 무기로 분류된다.
국제사회는 1997년 12월 캐나다 오타와에서 122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대인지뢰 사용을 막는 조약을 체결한 바 있다. 이 조약의 공식 명칭은 ‘대인지뢰의 사용, 비축, 이전 금지 및 폐기에 관한 협약’으로 ‘오타와 협약’으로도 불린다. 지난해 기준 164개국이 이 협약에 가입했지만 한국과 북한을 비롯해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 파키스탄, 이란, 이스라엘 등은 대체무기가 개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타와 협약 가입을 거부해왔다.
발트 3국 정부는 지난달 오타와협약에서 탈퇴한다고 유엔에 통보했다. 효력은 6개월 뒤 발효된다. 리투아니아는 러시아 역외 영토인 칼리닌그라드, 러시아 군사동맹인 벨라루스와 각각 국경을 맞대고 있다. 라트비아는 러시아·벨라루스, 에스토니아는 러시아와 국경을 각각 접하고 있다. 1991년 옛 소련에서 독립한 발트 3국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종전하면 총부리를 자신들에게 겨눌 것을 우려하고 있다.
폴란드 의회는 6월 오타와 협약 탈퇴를 위한 정부 제안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폴란드 정부도 유엔에 탈퇴 의사를 통보했다. 폴란드는 벨라루스, 칼리닌그라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러시아와 1300㎞ 국경을 맞댄 핀란드 정부도 7월 10일 유엔에 오타와 협약 탈퇴를 통보했다.
오타와 협약 가입을 거부해온 러시아는 그동안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대인지뢰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CNN 등 서방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개전 이후 2600만 개에 달하는 대인지뢰를 우크라이나 점령지와 전선 지역에 매설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영토 20만㎢에 지뢰를 깔아놓은 탓에 점령지 탈환이 쉽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남북한을 합친 한반도 전체 면적이 22만㎢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지뢰가 매설됐다고 볼 수 있다.
에스토니아군 병사들이 러시아와의 국경 지대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에스토니아 국방부새로운 냉전 시대 온다 이처럼 러시아의 대인지뢰가 효과를 발휘하자 미국도 지난해부터 우크라이나에 대인지뢰를 지원하고 있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요청에도 대인지뢰 제공을 거부해오다가 지난해 11월 이를 승인했다. 당시 미국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대인지뢰를 제공하는 것이 러시아의 진격을 늦추는 데 도움이 되는 가장 유용한 조치 중 하나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미국이 제공하는 대인지뢰는 비지속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사전에 설정된 기간이 지나면 지뢰가 비활성화된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6월 30일 오타와 협약을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우크라이나의 의도는 전쟁이 장기화하는 만큼 대인지뢰를 사용해 러시아군의 진격을 막겠다는 것이다.
핀란드 등 5개국도 우크라이나처럼 러시아의 침공을 저지하고자 국경 지대에 23억 유로(약 3조7000억 원) 규모의 각종 방어 시설을 건설하고, 대인지뢰 수백만 개를 매설할 계획이다. 대인지뢰가 뿌려질 지역들은 매우 광대한 데다, 인구 밀도가 낮고 삼림이 우거진 곳이 많아 유사시 러시아군 침공을 탐지하거나 막아내기가 어렵다.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러시아 인접국들은 지뢰는 물론, 장벽을 설치하고 드론 방어 시스템과 참호, 감시 시스템 구축에 나설 것”이라고 지적했다.
핀란드와 폴란드, 리투아니아는 내년부터 국경 지역에 매설할 대인지뢰를 대거 자체 생산할 계획이다. 폴란드 국영 방산그룹 폴스카 그루파 밀리타르나(PGM)는 7월 12일 대인지뢰 생산을 재개한다고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폴란드는 러시아, 벨라루스와의 국경 지역에 ㎞당 최대 3000개의 대인지뢰를 매설할 계획이다.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러시아 인접국들이 러시아의 침공을 저지하고자 국경선을 따라 고요한 숲에 지뢰 수백만 개를 뿌릴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안보전문매체 ‘내셔널 인터레스트’는 “처칠이 연설할 당시 소련의 영향권이던 국가 대부분이 오늘날 나토 회원국인데, 이들은 러시아에 맞서 새로운 철의 장막을 구축하기로 했다”고 분석했다. 새로운 철의 장막이 만들어지면 앞으로 냉전 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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