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현지 시간) 미국 상원 보건·교육·노동·연금위원회(HELP) 인준 청문회에 참석한 수전 모나레즈 당시 질병통제예방센터(CDC) 국장 후보자. 워싱턴=AP 뉴시스
미국 내 질병 대응을 총괄하는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수전 모나레즈 국장(51)이 27일(현지 시간) 취임 한 달도 안 돼 경질됐다. ‘백신 음모론자’로 알려진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미국 보건복지부 장관과의 갈등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케네디 장관 취임 후 예산 삭감과 인력 감축, 본부 건물에 대한 총격 사건으로 불안정한 위치에 놓인 CDC에 리더십 공백이 예상되면서 혼란이 가중될 전망이다.
미국 보건복지부는 이날 소셜미디어 X를 통해 모나레즈 국장이 더 이상 CDC 국장이 아니라고 밝혔다. 백악관도 언론을 통해 그의 해임 소식을 전했다. 지난달 31일 취임 후 4주 만으로 역대 CDC 국장 중 가장 짧은 임기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이날 모나레즈 국장이 백신 정책을 바꾸라는 케네디 장관의 지시에 저항한 뒤 “트럼프 대통령의 의제를 지지하지 않는다”며 사임 압박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또 CDC 백신 안전 감독센터장 등 고위 인사 3명을 해고하라는 지시에도 모나레즈 국장이 불응했다고 CNN은 전했다.
모나레즈 국장은 20여년 간 정부 기관에서 일한 보건 전문가다. 공화당과 민주당 정부 양쪽에서 모두 일한 적이 있다. 미생물학과 면역학 박사 학위가 있는 그는 1950년대 이후 최초로 의사 출신이 아닌 CDC 국장으로 화제를 모았다.
현지 보도에 따르면 케네디 장관과 그의 측근들은 지난달부터 모나레즈 국장에게 특정 코로나19 백신의 승인 철회 등 백신 정책 변경에 동조하라는 압박을 가했다. 25일 케네디 장관은 모나레즈 국장을 불러 재차 정부의 백신 정책에 동의하는지 물었고, 그가 ‘자문단과 상의 없는 정책 변경은 안 된다’고 하자 사퇴를 촉구했다.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미국 보건복지부 장관. 텍사스=AP 뉴시스사퇴도 거부한 모나레즈 국장은 이후 그는 미 상원 보건위원회 공화당 위원장인 빌 캐시디 의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케네디 장관 인준 과정에서 ‘기존 백신 프로그램 보호 약속’을 받아냈던 인물이다. 캐시디 의원에게 전화를 받은 케네디 장관은 격분했고, 모나레스 국장에게 “정보 유출자”라고 비난하며 해임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케네디 장관은 과거 백신이 자폐증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등 백신 안전성에 의문을 제기해 왔다. 그는 취임 전 코로나19 백신을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백신”이라 부르며 독극물이 들어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취임 후 미국의 백신 정책 방향은 크게 흔들렸다. mRNA 백신 연구 자금 지원이 중단됐고 CDC 백신 자문위원도 전원 해고됐다.
여기에 이달 8일 한 남성이 CDC 애틀랜타 본부에 총기를 난사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빚어진 혼란도 수습되지 못한 상태다. 총격으로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건물에는 수백 발의 총상이 남았다. 범인이 코로나19 백신 음모론에 빠져있던 것으로 알려지자 일각에선 백신에 대한 불신을 부추긴 케네디 장관에 대한 책임론을 주장했다.
모나레즈 측 변호인단은 언론 성명을 통해 “모나레즈 국장은 사임하지 않았고, 백악관으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지도 않았으며, 정직하고 과학에 헌신하는 사람으로서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사퇴를 거부한다고 밝혔다. 이어 케네디 장관이 “정치적 이득을 위해 공중보건을 무기화하고 수백만 미국인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CDC의 고위 관리 4명도 공개적으로 사퇴 의사를 밝혔다.
한편 미국 식품의약청(FDA)은 이날 화이자·모더나·노바백스의 새로운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승인하면서 대상자를 대폭 축소했다. 기존에는 생후 6개월 이상 대부분의 사람에게 백신 부스터샷 접종이 권고됐지만, 앞으로는 65세 이상 고령자와 기저질환자로 접종 대상이 제한된다. 케네디 장관의 의중이 반영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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