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민세관단속국은 9월 4일(이하 현지 시간) 조지아주 서배너에 있는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배터리 공장(HL-GA)을 급습해 한국인 300여 명을 쇠사슬 등으로 묶어 구금했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 홈페이지 캡처
‘웻백 작전(Wetback Operation)’은 1954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시 미국 대통령이 불법적으로 입국한 멕시코인 130만 명을 추방하고자 실시했던 대규모 이민 단속 조치를 가리킨다. ‘웻백’은 ‘젖은 등’이라는 의미로, 미국과 멕시코 국경인 리오그란데강을 건너 불법 이주한 멕시코인들을 비하하는 단어다. 당시 아이젠하워 정부는 국경순찰대, 경찰 등을 동원해 도로·철도를 봉쇄하고 농장과 사업장을 기습해 불법 체류자·이민자를 색출해 체포한 뒤 멕시코로 추방했다.
트럼프의 ‘제2 웻백 작전’
미국 이민세관단속국의 HL-GA 단속 당시 근로자가 쇠사슬에 묶인 모습. 미국 이민세관단속국 홈페이지 캡처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재취임 첫날인 1월 20일(이하 현지 시간)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인 불법 이민자 추방 작전에 돌입한다고 선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운동을 하면서 “아이젠하워 모델을 따라 불법 이민자들을 미국에서 내보낼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불법 이민자 대량 추방 계획은 스티븐 밀러 백악관 부비서실장이 입안해 주도하고 있다. 밀러 부비서실장은 불법 이민자를 연간 100만 명씩 추방하겠다면서 이민세관단속국(ICE)에 강력한 단속을 지시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ICE는 20만여 명을 추방해 목표에 한참 못 미친다. 그러자 밀러 부비서실장은 최근 ‘하루 3000명’이라는 할당량과 함께 체포 실적이 하위 10%에 드는 ICE 지부 책임자를 해고하겠다는 지침을 내렸다.
최근 ICE는 개별 단속만으로는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대규모 인력이 모여 있는 공장·건설 현장을 급습하는 작전에 나섰다. 9월 4일 조지아주 서배너에 있는 한국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HL-GA)을 단속한 것이 그 단적인 사례다. 당시 ICE는 불법 체류 혐의로 475명을 체포·구금했다. 이 중 300여 명은 한국인으로 확인됐다. 단일 사업장 단속으로 체포·구금한 불법 체류자 규모로는 사상 최대다. 이들은 적법한 비자를 갖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미국에서 일하려면 전문직 취업(H-1B) 비자 또는 비농업 단기 근로자(H-2B) 비자 등이 필요한데, 비이민 비자인 단기 상용(B-1)이나 단기 관광(90일 이내) 때 비자 신청을 면제하는 전자여행허가제(ESTA)로 입국한 뒤 일해온 것이다.
이번 사태에서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ICE 측이 공개한 영상이다. ICE는 9월 5일 홈페이지에 당시 단속 작전을 담은 2분 34초 분량의 영상을 올렸다. 요원들은 체포된 한국 근로자들을 마치 중범죄를 저지른 용의자처럼 쇠사슬이나 케이블 타이 등으로 허리와 손목, 발목을 묶어 호송차로 끌고 갔다. 이 영상에서는 체포·연행된 한국 근로자들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됐지만, 근로자들의 근무복 조끼에는 HL-GA, LG CNS 등 소속 회사명으로 추정되는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이는 불법 체류자와 이민자에게 본보기를 보이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ICE는 “이번 작전에서 체포된 이들은 비자 조건 또는 신분 위반으로 불법 근로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도 “내 생각에 그들은 불법 체류자였고, ICE는 자기 할 일을 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인권을 경시한 ICE 측 태도에 미국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주당 의원 20명은 공동성명을 내고 “이번 단속은 폭력적인 범죄자를 겨냥하는 대신 대규모 추방 목표를 채우기 위한 무분별한 행동”이라며 ‘쇠사슬 연행’을 비판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 대통령이 3월 백악관에서 이뤄진 조지아 배터리 공장을 비롯한 현대차그룹의 투자 발표를 ‘아름답다’며 한껏 치켜세웠지만, 이번 단속에서 한국인 근로자들이 쇠사슬과 밧줄 등에 묶인 채 끌려 나오는 장면은 한국인에게 아름다운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고 꼬집었다.
5000억 달러 약속했는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7월 1일 플로리다주에 있는 새 구금 시설을 방문했다. 뉴시스또 다른 문제는 투자와 비자 문제에서 엇박자를 보인다는 점이다. 한국 기업의 대미(對美) 투자 규모는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로만 5000억 달러(약 700조 원)에 달한다.
한국 기업들은 최근 수년간 리쇼어링과 제조업 부흥 등 미국 정부의 정책 기조에 맞춰 대미 투자를 크게 늘려왔다. 지난해 기준 한국 기업의 미국 대상 외국인직접투자(FDI)는 221억 달러(약 30조6900억 원)로 10년 전에 비해 3.7배 증가했다. 미국 내 일자리 중 80만 개(2023년 기준)는 한국 기업 덕분에 직간접적으로 만들어졌고, 한국 기업들이 현재 미국에서 공장 등을 건설하고 있는 현장은 39곳이다. 전체 규모는 86억 달러(약 12조 원)로, 1억 달러가 넘는 대형 프로젝트도 13곳이나 된다.
그간 한국 기업은 대부분 B-1 비자나 ESTA 등 ‘우회로’를 통해 미국 공장 건설 현장에 근로자들을 파견했다. 미국 정부가 H-1B와 H-2B 등 전문 인력들이 일하는 데 필요한 비자 발급을 제한한 데다, 발급에도 수개월이 걸리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으로선 미국인 전문 인력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공장 완공을 시한 내에 하려면 한국인 전문 인력들을 편법으로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 재임 시절 미국 정부는 한국 기업의 이런 관행을 어느 정도 묵인했지만, ‘반이민’ 정책을 기치로 내건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후 미국 정부는 원칙에 입각한 단속에 나서고 있다.
역대 한국 정부도 미국 정부와의 교섭에서 전문직 비자 쿼터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 미국이 1년에 8만5000개를 발급하는 H-1B 비자 가운데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한국은 별도 쿼터 없이 2000명 내외가 승인받는 데 그치고 있다. 반면 미국은 FTA을 맺은 캐나다·멕시코(무제한), 싱가포르(5400명), 칠레(1400명), 호주(1만500명) 등 5개국에 대해서는 국가별 연간 전문직 비자 발급 쿼터를 할당하고 있다.
WSJ “제조업 살리려면 비자 문제 해결해야” 미국 정부는 그동안 한국을 비롯한 각국 기업에 대규모 투자를 압박하면서도 정작 현장에 필요한 전문 인력의 취업 비자 발급은 엄격히 제한하는 등 모순적인 행태를 보였다. 트럼프 정부는 출범 후 한국을 비롯한 외국 기업들에 대규모 투자를 요구하며 ‘미국 제조업의 르네상스’를 외쳤지만, 정작 투자와 패키지로 묶이는 인력 유입에는 소극적이었다. 실제로 톰 호먼 국경 차르는 “앞으로 이런 대규모 단속을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미국 온라인 매체 ‘액시오스’는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에 공장을 지으라고 압박하면서도 동시에 이민 단속을 강화해 고숙련 엔지니어 부족을 초래했다”며 “이번 사태가 다른 해외 제조업체들의 대미 투자 계획에도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도 “미국에 투자하는 아시아 기업들이 미국 공장 가동에 필요한 인력들의 비자를 충분히 발급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미국이 제조업 투자를 유치하려면 전문직 비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인식하고 외국 기업 전문 인력들에게 신속히 비자를 발급해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가 반대급부로 요구하는 것은 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고 훈련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캐럴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외국 기업 근로자의 비자 문제 등을 해결하고자 국토안보부와 상무부가 공동 대응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부처 간 조율로 당장 시급한 전문·기술직 비자 발급을 확대하더라도 트럼프 행정부의 최우선 기조인 ‘미국 우선주의’에 따라 궁극적으로는 미국인 채용을 늘리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방침은 변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비자 발급을 완화, 확대하되 일정 규모의 미국인 채용을 조건으로 내걸거나, 자국 내 부족한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기술 교육 및 전수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단순한 ‘일자리 창출’을 넘어 한국 기업의 핵심 기술과 노하우까지 이전하라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