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9일 펜실베이니아주 마운트포코노에서 연설하고 있다. 마운트포코노=AP 뉴시스
최근 미국 최대 화두로 떠오른 생활비 문제 앞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특유의 단순 명료한 ‘한 방’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말 그대로 ‘물가로 화난 민심 달래기‘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물가와 주거비 위기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명쾌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는 사이 민주당은 지역 맞춤형 ‘핀셋 해법’을 제시하며 지방선거에서 연승을 거뒀다. 민주당의 영리한 민생 집중 전략이 11개월 앞으로 다가온 중간선거에서 판도를 흔들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분석도 나온다.
● 단순한 공약의 힘
9일(현지 시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시장 선거에서 승리한 아이린 히긴스(61) 당선인의 핵심 공약은 신속한 주택 공급이었다. 그는 시 소유의 유휴 부지를 찾아내 공공 주택을 보급하겠다고 제시했다. 이는 지난달 4일 뉴욕 시장에 당선된 조란 맘다니가 ‘임대료 안정화 아파트’의 임대료 동결과 공공 주택 20만 호 보급을 약속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아이린 히긴스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시장 당선인이 10일 기자회견을 앞두고 참모들과 대화하고 있다. 우측 벽에는 마이애미 지도가 붙어 있다. 마이애미=AP 뉴시스마이애미의 주거비 문제는 뉴욕 못지않게 심각한 수준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세법 변경과 코로나19 봉쇄 조치를 피해 부유층이 대거 유입되면서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급여 데이터 분석 기업 페이스케일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인구 약 48만7000명인 마이애미의 생활비는 미국 전국 평균보다 21% 높다.
특히 주거비 부담이 막대하다. 페이스케일에 따르면 마이애미의 주거비는 전국 평균을 59% 상회한다. 마이애미의 주택 중위 가격은 82만3000달러(약 11억5000만 원)를 넘어섰고, 월평균 임대료는 약 2500달러(약 350만 원)에 달한다. 버는 족족 집세로 나가는 상황에서 민주당의 주택 공급 공약이 유권자 표심을 사로잡은 것이다.
● 트럼프의 복잡한 해법
반면 생활비 문제에 대한 트럼프식 해법은 복잡하고 모호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식료품비, 전기료, 휘발유 가격 인하와 팁과 복지 혜택에 대한 면세를 주요 성과로 강조하고 있다. 이민이나 관세와 달리 하나로 수렴되는 간판 공약이 없다. 특히 9월 월간 소비자물가지수(CPI) 전년 대비 상승률이 3%를 넘긴 상황에서 생활비에 대한 불만은 커져만 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히긴스가 당선되던 날 펜실베이니아주 마운트포코노에서 연 첫번째 ‘경제 연설 투어’ 유세에서도 뾰족한 돌파구를 제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물가는 문제가 아니라고 일축하며 민주당이 자신을 깎아내리기 위해 ‘구입 능력(affordability)’이라는 용어를 이용해 사기(hoax)를 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날 공개된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인터뷰에서는 “내 경제 정책 점수는 A+++++”라고 자화자찬했다.
9일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에 지지자들이 환호성을 보내고 있다. 마운트포코노=AP 뉴시스다만 생활비 문제가 구조적으로 복잡한 측면도 있다. 생활비 문제는 전국 단위로 적용 가능한 단 하나의 만능 해법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이애미와 뉴욕 유권자들에게는 주거비가 가장 시급한 문제라면, 지난달 주지사 선거를 치른 버지니아와 뉴저지 유권자들에게는 전기료 등 공과금 부담이 더 큰 이슈였다.
민주당은 이처럼 지역적 차이를 포착한 ‘핀셋 구호’로 4연승을 거머쥐었다. 총선과 지방선거 성격을 띠는 내년 중간선거에서도 지역별로 다른 경제적 고통을 해결할 맞춤형 구호가 중요해질 전망이다. 지난달 뉴욕 시장 선거와 버지니아·뉴저지 주지사 선거에 이어 이번 마이애미 시장 선거가 정치권의 주목을 받는 배경이다.
미 의회 전문매체 더힐은 “마이애미 시장 당선인이 기자회견에서 ‘우리 도시는 생활비 위기의 최전선에 있다’고 언급했다”고 전하며 이번 선거의 상징성을 강조했다. 경제매체 포춘 또한 “민주당이 지역 이슈로 여겨졌던 주거비 등에 집중해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 유권자 맞춤형 후보 배출
지역별로 유권자 성향에 부합하는 인물이 등장한 점도 눈에 띈다. ‘진보 보루’ 뉴욕에서는 강성 진보 성향의 30대 무슬림 시장이 탄생했고, 애비게일 스팬버거 버지니아 주지사 당선인은 경찰관 아버지를 둔 백인 여성이다. 이처럼 지역 정서에 맞는 후보들이 선택받고 있다.
히긴스는 지난 30여 년간 쿠바계 공화당 정치인이 장악했던 마이애미에서 민주당 소속으로는 1997년 자비에르 수아레스 이후 28년 만에 처음 시장 선거에서 이겼다. 히긴스는 라틴계가 주류인 마이애미에서 ‘비(非)라틴계’이자 ‘민주당 소속’이라는 이중의 핸디캡을 안고 있었다. 뉴욕타임스(NYT)는 “히긴스의 (19%포인트 차) 압승은 그가 인종과 당파를 초월한 유권자 연합을 구축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마이애미 시장 선거 전날인 8일 히긴스가 지지자들과 막판 유세에 나섰다. 마이애미=AP 뉴시스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벨리즈에서 평화봉사단 단장으로 활동했던 히긴스는 ‘라 그링가(La Gringa, 스페인어권에서 백인 미국 여성이나 외국인을 지칭하는 말)’라는 별명으로 유권자들에게 다가가 2018년 지역 정치에 입문했다. 히긴스는 민주당 소속 정치인으로는 이례적으로 쿠바계 밀집 지역인 ‘리틀 하바나’를 포함한 공화당 강세 선거구를 대표했다.
히긴스가 유창한 스페인어를 구사하며 소통한 점도 주목받았다. 당선 직후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보복이 두렵지 않냐는 질문에 히긴스는 스페인어로 “전혀 두렵지 않다(No tengo ningún miedo de él)”고 답변하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실용 노선을 택한 점도 차별화에 도움이 됐다. 그는 2018년부터 카운티 위원으로 활동하며 교통, 인프라, 주택 문제 해결에 집중한 기술 관료 이미지를 강조했다. 자신은 “엑셀 시트에 할 일을 정리하겠다”며 치솟는 물가와 부패 스캔들로 얼룩진 현 시정의 혼란에 지친 유권자들에게 다가갔다. 사회 안정을 중시하는 쿠바, 베네수엘라, 니카라과계 유권자들의 정서에 맞춘 전략으로 분석된다.
● 트럼프와의 충돌 대신 ‘전략적 협력’
민주당 소속 지자체장 당선인들의 대(對)트럼프 전략 변화도 주목할 지점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격렬하게 대립하던 맘다니 뉴욕 시장 당선인이 당선 약 보름 만에 백악관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과 예상 밖의 ‘밀월 관계’를 연출한 것이 대표적이다. 맘다니는 “아파트 20만 호를 보급하겠다”며 연방 정부와의 협력을 모색하는 실리적 행보를 보였다.
히긴스 역시 트럼프 대통령과 불필요하게 대립하지 않는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폴리티코에 따르면 이번 선거 기간 동안 히긴스는 언론의 질문이 없는 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선 직후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의견이 일치할 때도 있다”며 지역 교통 프로젝트에 대한 연방 자금 지원을 유지해 준 점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히긴스 당선인(맨 앞줄 왼쪽 두번째)이 지난달 마이애미 시내에서 열린 트리 점등식 축제에 참석해 라틴계 주민들 사이에 앉아 있는 모습. 사진 출처 히긴스 인스타그램마이애미에 들어설 예정인 ‘트럼프 대통령 기념 도서관’과 내년 12월 트럼프 내셔널 마이애미 도럴 리조트에서 열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등 트럼프 대통령과 얽히게 될 굵직한 사안에 대해서도 유연성을 발휘했다.
히긴스는 지난달 TV토론에서 대통령 도서관이 들어설 시 유휴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에 대해 “그 땅을 매각해 식량 지원이나 교통 예산 등 삭감된 복지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대통령 도서관 유치를 “영광”이라고 표현하며 트럼프 대통령 개인에 대한 비난은 삼갔다. 이는 불필요한 정쟁을 피하고 실리를 챙기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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