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의료원
한타바이러스 백신 개발 ‘프로젝트 H’… 2027년 임상 1상 완료 목표로 연구 매진
생물안전 시설 등 기반 마련에도 힘써
산학 협력 기반 ‘메디사이언스파크’… 건강보험공단 빅데이터 센터 유치
병원 임상 데이터 활용한 연구 활발
작년 외부 연구 1670억 수주 등 성과
윤을식 고려대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은 메디사이언스파크와 백신 혁신센터의 연구개발 기대 효과에 대해 7가지를 강조했다. △국가 연구개발 주력과 연구 과제 수주 △최상위 6대 저널 성과 발표 △기업 상장 △신종 감염병 mRNA백신개발 △국제 MRI 연구 컨소시엄 결성 △자립형 임상시험 검체 분석기관 운영 △의사과학자 육성의 산실 등이다. 고려대의료원 제공
《신종 감염병은 주기적으로 인류를 찾아와 괴롭혔다. 1918년 스페인독감으로 1억 명의 인류가 목숨을 잃었으며 1957년 아시아독감, 1968년 홍콩독감이 유행할 땐 각각 100만 명과 70만 명이 사망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신종인플루엔자(신종플루),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가 있었다. 가장 최근 발생해 아직도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누적 사망자는 현 재까지 708만여 명에 달한다.
새로운 바이러스의 공격에 면역력이 없는 인류는 속수무책이다. 기존에 알려진 바이러스가변이를 일으킬 수도 있고 에이즈나 에볼라처럼 동물에게만 침투하던 바이러스가 종간 장벽을 넘어 인간의 몸에 들어오면서 대유행 감염병을 유발할 수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앞으로 어떤 바이러스가 유행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백신 주권 확보의 희망 ‘고려대 의과대학 백신혁신센터’
어느새 코로나19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고려대의료원은 인류를 위협할 다음 바이러스에 대한 대비를 시작했다. 2021년 연구 중심 캠퍼스 정릉 메디사이언스파크와 청담 고영캠퍼스를 연이어 오픈하면서부터 계획한 일이다.
고려대의료원의 이런 행보는 ‘백신 명가’로서 그간 이룬 자신감에서 나온다. 과거 노벨생리의학상 후보로 꾸준히 거론됐던 고(故) 이호왕 고려대 명예교수는 세계 3대 전염성 질환으로 꼽히는 유행성출혈열의 병원체 ‘한타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발견하고 예방 백신인 ‘한타박스’를 개발했다. 고려대 의대의 개척 정신은 계속 이어져 감염내과 교수들은 2009년 녹십자와 신종플루 백신을 만들었으며 2016년에는 SK케미칼과 함께 세계 첫 세포배양 4가 독감 백신 탄생을 주도했다.
아스트라제네카, 모더나, 화이자 등 코로나19 유행 초기부터 백신을 내놓은 세계적 기업들은 어느 날 갑자기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나선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10년 이상 mRNA 연구와 감염병 백신 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과감한 투자를 바탕으로 기초 연구에 전념했다. 이에 원천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고 긴급 상황에서 이를 활용할 수 있었다. 고려대의료원이 다음 대유행에 대한 사전 대비 필요성을 절감하고 설립한 것이 바로 ‘백신혁신센터’다.
백신혁신센터는 효과적이고 안전한 백신 개발을 통해 다음 감염병에 대비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정희진 교수(구로병원 감염내과)를 수장으로 센터 운영을 담당하는 연구지원부, 기초·비임상 연구를 추진하는 혁신연구부, 임상시험 연구를 맡은 개발 추진부로 진용을 짜고 고려대의 감염병 연구 핵심 인력을 모두 투입해 백신 개발을 위한 최적의 구성을 갖췄다.
현재 고려대의료원은 연구 기반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백신혁신센터는 백신 개발에 써달라며 100억 원을 기부한 현대자동차그룹 정몽구 명예회장의 이름을 딴 메디사이언스파크 정몽구관으로 이전 예정이다.
연구실에는 위험한 신종 병원체를 안전하게 다루고 백신을 연구할 수 있는 대규모 생물안전 3등급 시설이 들어선다. 연구자가 다양한 유형의 신종 병원체를 종합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유전체 분석, 세포 배양, 면역 화학 분석과 단일세포 전사체 분석 장비 등 최고 수준의 장비를 갖춘 거대한 규모의 중앙실험실을 구축할 예정이다. 특히 IVIS 광학 영상 시스템, 이미지 처리 기반 초고속 세포 분석 장비, G3 로봇 워크스테이션 등 고가의 첨단 장비를 도입해 최상의 백신 연구개발 환경이 조성된다.
임상시험 검체 분석에 대한 정부의 공식 인증을 의미하는 GCLP(임상시험 검체 분석 관리 기준) 시설도 구축한다. 전처리, 검체 분석과 실험, 자료 보관 등 최상의 실험 장비를 도입해 교차 오염을 방지할 수 있는 분리 독립 공간이다. 고려대의료원은 대학 연구기관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의 생물안전 3등급 연구시설과 ABL3를 보유함으로써 백신 개발에 필요한 임상시험 검체 분석 기능을 포함해 고위험 신종 병원체의 백신 연구개발 전주기 과정을 모두 실행할 수 있는 독보적인 역량을 갖춘 연구기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국내 최초 민간 중심 전주기 백신 개발 플랫폼과 ‘프로젝트 H’
백신혁신센터는 2021년 설립 후 여러 기관 간의 협업을 통한 유기적인 백신 개발 체계 구축에 전력을 다해 왔다. 고려대의료원 산하 안암, 구로, 안산병원을 포함해 전국 8개 대학병원이 함께하는 ‘HIMM(Hospital Infection Morbidity Mortality) 네트워크’ 체계를 통해 환자 검체를 확보하고 병원체를 분리하는 일종의 병원체 은행을 구축하는 것이다. 병원체의 유전체 분석, 변이주 분석이 이뤄지고 나면 백신 항원 디자인과 개발, 항원 효능 평가 전임상시험 등 기초연구가 진행된다.
확보된 백신 후보 물질이 실제 사람에게 사용할 수 있는 백신으로 허가받기 위해서는 임상시험이 필수적이다. 고려대의료원 백신혁신센터는 그간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인플루엔자 백신과 국산 신종 인플루엔자 백신, 스카이코비원 승인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다양한 임상 연구 경험과 비결을 확보해 국제적으로도 최고 수준의 임상시험 능력을 갖추고 있다.
작년 7월 모더나 최고의학책임자(CMO)인 프란체스카 세디아가 고려대 의과대를 방문해 초대 백신혁신센터장이던 고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김우주 교수를 만났다. mRNA 기반 한타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는 사업인 ‘프로젝트 H’를 위해서다. 가장 혁신적인 백신 개발 플랫폼인 mRNA 기술을 보유한 모더나와 세계 최초로 한타바이러스를 발견한 고려대 의과대 연구진이 힘을 합친 것이다. 현재 연구진은 2027년 임상 1상 완료를 목표로 소동물을 대상으로 비임상 효능 시험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한타바이러스는 세계보건기구(WHO)와 우리나라 질병관리청이 앞으로 인류에게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는 감염병으로 선정한 바이러스 중 하나다. 스페인독감과 신종플루는 유전자 변형이 일어난 독감 바이러스가 원인이었다. 반면 사스, 메르스, 코로나19는 코로나바이러스 변이가 원인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한타바이러스를 비롯해 결핵, 말라리아,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HIV), 지카 바이러스 등 주요 병원체에 대한 백신을 미리 준비하면 다음 신종 감염병도 빠르게 막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프로젝트 H를 통해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mRNA 기반 한타바이러스 백신이 개발돼 상용화된다면 감염병 위기 대응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백신혁신센터는 모더나 외에도 국내 바이오 기업과 활발히 협력하고 있다. 2022년 SK바이오사이언스와 손잡고 신종·변종 감염병에 대한 감시, 임상 네트워크 구축과 병원체 유전체 DB 구축, 특성 분석 등 50억 원 규모의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바이러스 벡터 기반 항원 발현 연구, 국내 기술 기반의 mRNA 백신 플랫폼 개발, 원천 기술 연구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고려대의료원은 인재 양성을 통한 국내 백신의 연구개발 생태계 확대도 꾀하고 있다. 백신혁신센터 설립 이래 지속해서 운영하는 ‘백신 전문가 양성 교육 프로그램’은 지난 3년간 약 850명의 대학, 연구기관은 물론 정부 기관과 기업체 관계자가 교육 과정을 이수했다. 국제 심포지엄과 세미나도 활발히 주도하고 있어 국내외 유수 기관과의 학술적 협력 가능성도 점차 커지고 있다.
백신 연구개발을 위한 최적의 개방형 혁신 모델, 메디사이언스파크
백신 개발에는 많은 인력과 자금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면역학, 감염학, 바이러스학, 역학, 통계학 등의 전문가가 투입돼 체계적인 협업이 이뤄져야만 가능하다. 또한 동물실험, 임상시험, 정부 허가, 접종 부작용 모니터링, 가격 책정, 생산 등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를 위해 고려대의료원이 만든 것이 메디사이언스파크다.
백신 사업뿐만 아니라 중증 난치성 질환 극복을 위한 의료 신기술 개발과 차세대 정밀의학 실현은 대학병원의 단독 역할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메디사이언스파크는 기획 단계부터 유기적인 산학 협력이 이뤄지는 융복합 연구개발 허브를 핵심 콘셉트로 잡았다.
핵심 시설인 백신혁신센터뿐만 아니라 자체 GMP(우수 제조품질 보증) 제조 시설을 갖춘 항암 신약 업체를 비롯해 의료 빅데이터, 난치성 질환과 유전자 치료제, 디지털 치료제, 전자약, 스마트 진단 기술 개발 등을 주력으로 하는 유망 헬스케어 기업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있다. 또한 ‘건강보험 빅데이터 분석센터’가 국민건강보험공단과 공동으로 운영되고 있어 병원의 임상 데이터와 건강보험 빅데이터와의 결합을 통한 융복합 연구도 이뤄지고 있다.
고려대의료원은 천혜의 연구 환경인 메디사이언스파크를 기반으로 최대 30여 기관까지 입주를 확대해 산학 협력을 통한 융복합 연구의 규모를 키운다는 계획이다. 의료원은 메디사이언스파크뿐 아니라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와 손잡고 인근에 자리 잡은 홍릉 바이오·의료 연구개발 주요 시설인 서울바이오허브의 민간 위탁 운영자로서도 나서고 있다.
2004년 고려대 산학협력단 산하 의무산학협력실로 시작한 조직은 2014년 의료원 산학협력단으로 지점 승격돼 독립적이고도 유기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는 산학협력·연구전략·기술사업화·임상 연구지원 등으로 세분된 전담 조직에 기관의 핵심 인재가 투입됐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시스템에 기반한 성과는 확실하다. 고려대의료원의 지난해 외부 연구과제 수주액은 약 1670억 원에 달한다. 고려대의료원의 지식재산권 출원 건수는 지난 3년 평균 370건을 훌쩍 넘는다. 2021년부터 최근까지 의료원이 계약한 정액 기술료도 570억 원에 육박한다.
윤을식 의무부총장은 “의료기관은 당장의 질병 해결에만 급급한 것이 아니라 질병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코로나19 때 절감했다”라며 “백신 개발은 10년 이상 장기 연구를 통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만큼 메디사이언스파크와 백신혁신센터를 중심으로 지속가능한 전주기 백신 개발 플랫폼을 구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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